‘범사유인정 후래호상견(凡事留人情 後來互相見).’ 평소 주변 사람에게 정을 베풀면 언젠가는 서로 좋은 감정으로 만난다는 뜻이다. 10여 년 전부터 마음에 새겨온 문구로 언제나 내 책상 한쪽에 놓아두고 있다. 공직에 있을 때 간혹 뜻을 궁금해 하는 방문객에게 해석을 해 주면 감독기관이 피감기관에 정을 베풀면 감독이 제대로 되겠느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그러나 업무와 인격은 별개의 것이며 업무적으로 의견이 대립되더라도 인격적으로는 존중하고 정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감독기관이 취해야 할 도리라고 설명하면 대부분이 내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다.나는 능력과 나이에 비해 아직 왕성하게 일을 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여건을 만들어 준 모든 분들에게 늘 감사하고 어떻게 하면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며 살고 있다. 우선 객관적으로 보아 마지막 직장인 현재의 회사에서 신설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로서 충실히 수익 기반을 다지고 그 다음으로 바쁜 와중에라도 틈을 내어 주변을 돌보며 정을 베풀고 사는 것이 보답의 길이라고 생각한다.30여 년간 공직에 있다가 민간 기업의 CEO가 된 나에게 소위 ‘갑’의 입장에서 ‘을’의 입장이 된 소감과 그에 따른 어려움에 대해 많이 묻는다.나는 출신 배경보다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노력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백수가 되기 직전 친구 한 명이 이제야 사람 되겠다며 축하 전화를 했다. 놀아봐야 사람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의욕이 왕성한데도 일을 못하는데 따른 공허감 박탈감 배신감 서운함 등의 혼재 속에서 실제로 나는 차츰 ‘사람’이 되어 감을 스스로 느끼게 됐다. 지금은 다행히 재취업해 소위 ‘을’ 정도의 입장이 되었지만 자세를 낮춘다는 뜻에서 ‘병’ 정도의 자세로 매사에 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이제는 나이도 들어가고 민간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 소개한 한자 문구의 뜻이 더 마음에 와 닿을 때가 많다.남에게 베풀기 위해 반드시 경제적으로 풍족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조금만 비우면 가능한 일이 바로 베풂이다. 비우면 다시 채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비움을 거창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베풂이 쉽지 않다. 자기 능력 범위 내에서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인생이란 추운 겨울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어 주변을 따뜻하게 함으로써 보람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고작해야 종교 단체를 통한 쥐꼬리만큼의 성금 정도로 평생을 지내온 주제에 이런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금전 이외의 방법으로 남에게 정을 주고 베풀겠다며 한 일이라곤 백수 시절 경험 삼아 몸으로라도 때울 수 있는 방법으로 무료 급식소에서 배식과 설거지를 한 것이 전부다. 재취업한 이후에는 그것마저도 시간적으로 쉽지 않다.그러던 중 우연히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마땅한 주례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 나에게 주례를 요청하면 불가피한 스케줄이 없는 경우엔 모두 서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 주례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지만 주례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 주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주례 바겐세일’이다.주례를 설 때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선 내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어서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것도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은퇴한 후에도 ‘나만의 봉사활동’으로 주례를 계속 서 줄 생각이다. 그것이 내가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작은 베풂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주례가 필요한 예비부부는 언제든지 연락하길 바란다.LIG투자증권 사장약력: 1949년생. 69년 용산고 졸업. 76년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2001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2005년 한국증권업협회 자율규제위원. 2006년 LIG손해보험 상근 감사위원. 2008년 LIG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