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는 ‘사회책임 경영’

미국발 금융 위기가 전 방위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전 세계는 사상 유례없는 마이너스 성장과 대량 해고의 가능성 앞에 잔뜩 숨을 죽이고 있다. 미국 정부는 7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구제금융을 쏟아 붓고 있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파산 직전에 몰린 자동차 산업은 실물 부문에 닥칠 거대한 위기의 서막일 뿐이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라는 이번 참사는 ‘사회책임 경영(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극적인 방식으로 확인해 준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금융 구제뿐만 아니라 윤리 구제(ethical bailout)”라며 “시장과 윤리와 규제 사이에 균형추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오늘날 사회책임 경영은 기업가 정신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눈앞의 단기적 이익에만 집착하는 기업가의 ‘탐욕’은 기업 자체의 장기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엄청난 해악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경제와 환경, 지역사회 등을 포괄하는 지속 가능한 성장에 굳건하게 방향타를 맞추고 다양한 이해관계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적극적인 기업가는 기업 경쟁력과 기업 가치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다. 과거에는 돈을 잘 기부하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이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사회책임 경영도 계속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사회책임 경영의 원칙을 비즈니스 프로세스 안으로, 경영 조직 내부로 끌어들여 체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근본적인 변화에 실패한 기업은 미래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사회책임 경영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지난 2007년 국내 한 대기업 계열사는 핀란드의 휴대전화 제조업체 노키아에 배터리를 납품하려다 좌절할뻔한 적이 있다. 가격 협상까지 마무리 지었는데 노키아가 돌연 환경오염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이 회사는 수개월에 걸친 노키아의 깐깐한 실사를 받고 나서야 배터리를 납품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제품을 수출할 때 가격이 최우선이었지만 이제는 환경을 포함한 사회적 책임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글로벌 리딩 기업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1996년 파키스탄 어린이를 고용해 축구공을 꿰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엄청난 주각 폭락을 경험했던 나이키는 이후 하청업체에까지 일정 수준의 사회책임 경영 요구하고 있다.‘착한 소비’를 추구하는 소비자의 등장은 또 다른 변화 압력으로 작용한다. 미국의 사회책임 경영 컨설팅 업체인 콘로퍼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가격이 같다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제품을 사겠다’는 응답이 1993년 66%에서 2004년 86%로 20%포인트 늘었다. 이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2007년 말 LG경제연구원이 국내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품질이 같다면 사회적 책임을 잘 이행하는 기업의 제품을 더 비싼 값으로도 살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전체의 88.7%를 차지했다.아프리카 등 제3세계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자는 국제 빈민구호단체 옥스팜의 공정 무역 운동은 이제 고전적인 사례에 속한다. 공정 무역 운동은 커피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돼 스위스의 경우 맥도날드 전 매장이 ‘공정 무역 커피’만을 사용하고 영국에서는 1500여 종에 달하는 공정 무역 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영국 대형 유통 업체인 세인즈베리는 공정 무역 바나나만을 취급한다. 네슬레 스타벅스 맥도날드도 공정 무역 운동에 앞 다퉈 동참하고 있다.이런 변화는 중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지난 2008년 5월 발생한 쓰촨 대지진 이후 중국 네티즌 사이에 ‘구두쇠 랭킹’이 유행했다. 지진 성금 액수가 적은 기업 순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 명단에는 코카콜라 KFC 노키아 P&G 등 많은 기업의 이름이 올랐고, 이들에 대한 비난과 불매 운동 움직임이 인터넷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해당 기업들은 뒤늦게 거액의 성금을 냈지만 추락한 이미지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제 사회책임 경영을 고려하지 않으면 더 이상 중국에서도 사업을 하기 어려워진 것이다.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국내 대기업들에 사회책임 경영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삼성전자는 2008년 ‘지속가능성보고서’를 발간했다. 유엔환경계획(UNEP) 산하 비상설 자문기구인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환경과 지역사회 개발, 기회 균등, 인권 등 여러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 어떤 정책을 세우고 실천했는지를 담은 보고서다. 삼성전자는 이미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녹색경영보고서를, 2006년과 2007년에는 환경·사회보고서를 발간해 왔다. 하지만 사실상 국제 기준으로 자리 잡은 GRI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삼성전자가 상당한 공을 들여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삼성전자는 보고서 발간을 계기로 사회책임 경영의 선두 기업들만으로 구성된 다우존스지속가능성지수(DJSI) 편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다우존스와 스위스의 자산운용사 SAM이 공동 개발한 DJSI는 재무 상태, 윤리 경영, 환경 정책, 사회공헌 등 80~120개 지표를 기준으로 매년 산업별 상위 10% 기업을 선정하는데, DJSI 편입은 사회책임 경영의 글로벌 리딩 기업으로 인정받는다는 걸 뜻한다.DJSI 편입을 준비하는 곳은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올해 DJSI 편입을 위한 평가를 받은 국내 기업은 LG전자 KT 삼성중공업 현대자동차 국민은행 등 68개에 이른다. 수개월에 걸친 평가를 통해 이 가운데 삼성SDI 포스코 SK텔레콤 등 3개만 DJSI에 최종 편입됐다. 관련 기업들은 “DJSI에 편입되면 대내외적으로 사회책임 경영에 충실한 기업이라는 인식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마케팅이나 해외 입찰, 투자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 기업들에 DJSI 편입 여부는 한국이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이나 FTSE 선진국지수에 포함되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다.사회책임 경영 확산에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금융이다. 투자 기업을 고를 때 사회적 책임에 충실한 기업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펀드매니저들이 많아지고 있다. 재무제표가 아무리 좋아도 사회책임 경영에 관심 없는 회사는 선택받기 어렵다. 사회적 책임이 도마 위에 오르면 회사가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책임투자(SRI: 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현재 SRI 시장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400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내 SRI 펀드 규모는 2005년 말 2조2900억 달러로 1995년 이후 연평균 13.6% 성장했다. 국내에서 국민연금이 SRI 펀드에 4400억 원을 투자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예정이다. 지난 2008년 2월 기준으로 국내 SRI 자금 규모는 1조9000여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SRI 펀드들이 투자할 때 중요하게 참고하는 것이 바로 DJSI다.사회책임 경영의 국제표준화 작업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국제표준화기구(ISO)는 2010년 도입을 목표로 ‘ISO-26000 사회적책임 가이던스’ 제정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는 국제노동기구(ILO), WTO, 유엔글로벌콤팩트 등 41개 국제기구가 함께 참여하고 있다. 환경, 인권, 노동, 지배구조, 공정한 업무 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사회 참여 등 7개 분야에서 실행 지침을 제공하는 게 목표다. 강제성은 없지만 ISO-26000 이행 여부를 납품 조건으로 제시하는 등 사실상의 강제 규범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