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위기와 기업가 정신

“지금이야말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때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도전적인 경영을 해야 합니다. 지금 투자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없습니다.”지난 2008년 12월,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가 정신을 부르짖었다. 지금까지 한국이 수많은 위기와 도전을 이겨낸 것처럼 이번 글로벌 경제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할 것이며 이를 위해 기업인들의 도전 정신을 주문했다. 기업인들이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도 챙기겠다고 약속했다.위기의 골이 깊어질수록 기업가 정신 부활이 유력한 해법으로 부각되고 있다. 경제의 근간이 기업이므로 기업이 위기 극복에 앞장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공격적인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는 논리다.요즘처럼 불확실성이 높아질 때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일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기업가 정신의 본래 뜻이 불확실성에 도전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불확실성이 높으니 기업가 정신을 접으라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오히려 불확실성이 강할수록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역사적인 경험에 비춰 봐도 기업가 정신이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시기는 경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였다. 이 시기에 기업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위기 이후 위상이 크게 달라진다는 게 과거의 교훈이다.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4차례의 경기 침체기를 겪었다. 1970년대의 1, 2차 오일 쇼크, 1990년대 초의 미국 경제의 침체기, 1990년대 말 일본 경제의 불황, 2000년대의 정보기술(IT) 버블 붕괴에 따른 위기가 그것이다. 4번의 위기는 이유, 지속 기간, 영향 범위 등에서 모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하지만 침체기 이후 업계의 구도가 크게 바뀌었다는 점은 동일했다고 LG경제연구원은 지적한다. 맥킨지 앤드 컴퍼니(Mcki nsey & Company)에 따르면 IT 버블 이후 미국의 상위 25% 기업들 중 40%가 상위 그룹에서 탈락했고 하위 75%에 속했던 기업 중 14%가 상위그룹으로 부상했다. 이때의 침체 기간이 1년 남짓이었음을 고려하면 가히 ‘지각변동’이라고 할만한 변화였다.이 연구원은 침체기 이후 성공한 기업들은 모두 ‘빅 픽처(Big Picture)’를 가지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중·장기적인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노키아가 대표적이다. 이 기업은 애초에 IT 기업도 아니었다. 1980년대까지 목재 고무 제지 사업을 하는 굴뚝 기업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경기 침체가 시작되자 극도의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주력 사업이 모두 경기에 민감하기 때문이었다.노키아는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기존 사업은 매각하고 대신 영국의 테크노폰을 인수하고 이동통신 사업에 집중했다. 경험이 없는 시장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투자를 감했다. 뒤돌아보지 않는 저돌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노키아는 1998년 마침내 시장점유율 1위 업체로 등극한다. 그후 노키아의 시장점유율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미래를 위해 제 살을 잘라내고 자신 있게 걸어 나간 노키아의 ‘빅 픽처’가 실현된 셈이다.‘빅 픽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기업가 정신의 발휘가 경기 침체기 이후의 기업의 위상을 결정짓는 요소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모든 기업에 기업가 정신을 무작정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에 투자를 요구할 수는 없으며 인적 역량이 떨어지는 기업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개발에 착수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재무구조와 소프트파워 등 기업의 상황에 맞는 위기 극복 방안을 제시했다. 재무구조나 소프트파워가 강한 기업이라면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재무구조와 소프트파워가 약한 기업은 생존을 위한 재원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으라는 제안이었다.그렇다면 한국의 기업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일까. 일단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차 등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들은 업계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재무구조 또한 세계 일류 회사와 견주어 뒤지지 않는다. 재무구조와 소프트파워 모두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게 삼성경제연구소의 분석이다.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큰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기업가 정신이 미래 성장의 동력이라는 점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기업가 정신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기업가 정신은 절대로 ‘막무가내’식 정신이 아니다. 불확실성을 감내한다고 하지만 기업가는 가능한 한 불확실성을 계산하고 성공 가능성을 따져본 뒤 행동에 나선다. 큰 그림을 그린 후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구상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삼성경제연구소의 ‘한국 고성과 기업의 특징-적극적 투자를 통한 내부역량 강화’라는 보고서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먼저 산업 경기와 기업의 실적은 연관성이 별로 없었다. 현재 영위하고 있는 산업의 경기가 내리막길이라고 하더라도 하기에 따라 고성과를 낼 수 있다는 얘기다. 기업의 규모도 성과와는 상관성이 높지 않았다. 해외 수출이나 해외 매출 비중도 기업의 성과 차이를 내는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투자였다. 유형 자산 증가율과 성과, 연구·개발(R&D) 투자와 성과는 깊은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다.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고성장 기업들은 2005~07년 사이 연평균 9.2%씩 유형 자산이 증가한 반면 저성장 기업들의 유형 자산 증가율은 0%였다. R&D 비중은 고성장 기업이 3%, 저성장 기업이 1%였고 광고비 등 마케팅 투자 증가율은 각각 17.5%, 3.4%였다. 하지만 연구소는 고성장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글로벌 상위 기업과 비교하면 투자액이 적다고 지적하며 보다 많은 투자를 주문했다.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는 해도 이번 경제 위기는 이전의 위기에 비해 파괴력이나 범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금융에서 촉발된 위기가 실물로 이전되면서 소비 경기가 급속히 식어가고 있어 신규 투자를 하기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실제로 포스코, 현대차 등 국내 대표 기업들이 감산을 발표하는 등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상황이 이렇다면 기업이 기업가 정신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투자 실패에 대한 책임이야 기업이 진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규제를 철폐 또는 완화하는 것으로도 기업들의 투자 열기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산업연구원이 중소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최근 기업가 정신의 쇠퇴를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사업 실패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및 재기 불가능’이었다. 이는 중소기업 생태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가에 대한 좋지 않은 정서도 기업가 정신 부진의 이유로 지목됐다. 이와 관련, 산업연구원은 “기업가 정신 함양을 위해 사업 실패에 따른 기업가의 부담 완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기업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 규제 완화 등의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