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출신의 아버지는 세 명의 누이들이 있는 외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기대가 컸었고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들어가셨다. 이후 아버지는 대기업의 잘나가는 샐러리맨이 되셨다.내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는 항상 바쁘셨고 부산에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 해운대에 여름휴가를 갔을 때도 아버지는 회사일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하셨다. 아버지 고향인 충북 음성에 내려갈 때면 고향 분들의 아버지에 대한 환대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새옷에 당시 어린이용 시계까지 차고 내려갔고 내 또래 시골 아이들은 매우 부러워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사업을 하기 위해 잘나가던 대기업 샐러리맨 생활을 그만두셨다.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큰 결심을 하셨다. 지금까지 경험을 살려서 큰 사업을 하시기로 결심하시고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적극적으로 도우셨다. 사업이 잘되는지 우리 집 앞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가용과 운전사까지 있었다. 당시 자가용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학교 친구에게나 동네에서도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지막 사업은 1년이 못돼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나와 내 동생은 아버지와 같이 여행을 떠났다. 며칠 안 되는 짧은 여행이었는데 아버지는 손수 밥을 지어서 나와 동생에게 주셨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지금 우리 가족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말씀하셨다. 주로 앞으로 당부의 말씀이셨고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얘기였다. 사업이 잘 안 돼 당분간 어려울 것이니 모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당부의 말씀이셨다.나는 불안했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안심했다. 나는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니 책임감이 생기며 사뭇 비장해지기까지 했다. 아버지와의 여행 이후 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계획은 쉽게 실현되지 못했다. 나는 현실의 냉정함을 경험했다. 그 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나는 경제학이 무엇인지 몰랐고 문학도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당시에도 말씀하지 않았고 지금도 말씀하지 않지만 아마도 안정적인 은행원이나 공무원이 되길 원하셨던 같다.나의 대학 생활은 불행했다. 5공의 서슬 시퍼렇던 분위기에 문제의식이 많았던 경제학과 학생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학회 활동을 했다. 학회 활동을 하던 선배, 동료, 후배들이 미문화원 점거 농성 때 TV에 스쳐 지나가는 걸 본 이후 나는 학회 활동을 그만뒀다. 함께 학회 활동하던 친구들의 눈이 부담스러워 학교 가기가 싫어졌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화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미술품이 거래된다는 것이 신기했고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신천지에 온 것 같았다. 미술이 재미있었다. 작가들과 만나서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그들의 작업실을 기웃거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만나는 사람들도 틀에 박힌 사람들이 아니라 재미있었다.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가 희한한 걸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친구들은 화랑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알지 못했고 어떤 친구는 액자점에 다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난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아버지는 대기업을 원하셨지만 나는 결국 화랑에 취직하기로 결심했고 아버지는 못마땅해 하셨다. 그러나 나는 내 결심대로 했다. 그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렸다. 나는 이런 세계에 날 이끌어준 분에게 감사하고 현실의 세계에 설 수 있게 도와준 분에게 감사한다. 나는 지금도 경제적 여유가 있든 없든 먹고살기 바빠서 이런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난 그 세계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 그 세계에서 짧은 순간에라도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20년 후 대학 동창들을 만났다. 20년 만에 처음 보는 친구들도 많았다.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들과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모두가 중년이 됐다. 그런 그들은 나를 위해 손뼉을 쳐 줬다. 친구들은 상장사 대표이사가 된 나를 축하해 줬다. 난 계면쩍게 웃고 있었다.1965년생.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1989년부터 10년간 가나아트갤러리 국제부장으로 근무하며 해외 현대미술의 흐름을 소개했다. 1998 서울경매(현 서울옥션) 창립 멤버로 참여해 총괄이사, 영업본부장, 전무 등을 거쳐 지난 10월 대표이사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