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동산 사냥 나선 오일 달러
미국 뉴욕 4433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77층의 크라이슬러 빌딩. 은빛으로 반짝이는 첨탑 모양의 이 건물은 1930년 완공된 이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더불어 맨해튼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꼽혀왔다. 1930년 완공 당시에는 세계 최고층 빌딩이었으나 1년 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영화 ‘킹콩’의 마지막 장면에도 등장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빌딩이 됐다.이처럼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대표하는 크라이슬러 빌딩이 최근 중동 자금에 넘어갔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국부 펀드인 아부다비투자위원회(ADIC)가 8억 달러에 크라이슬러 빌딩 지분 90%를 사들인 것이다. ADIC는 크라이슬러 빌딩 지분 75%를 독일계 금융 회사인 푸르덴셜파이낸셜의 부동산 투자 계열사로부터, 15%는 미 부동산 개발 업체인 티시만 스페이어 프로퍼티로부터 각각 매입했다.앞서 지난 5월엔 쿠웨이트와 카타르의 국부 펀드가 보스턴 프로퍼티 및 골드만삭스 등과 손잡고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 GM 빌딩을 28억 달러에 인수했다. 미국 부동산 거래 사상 최고가였다.중동 오일 달러가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삼키고 있다.리얼 캐피털 애널리스틱스 집계에 따르면 올 들어서만도 18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내 상업용 부동산의 소유권이 중동 자본으로 넘어갔다. 마치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에 걸쳐 맨해튼의 록펠러 빌딩 등 랜드마크 빌딩들을 사들이는데 780억 달러를 쏟아 부은 일본의 미국 부동산 구매 열풍을 재현하는 듯하다. 미국 달러 가치가 폭락한데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빌딩 가격까지 하락한 반면 초고유가로 오일 달러가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걸프만 연안 국가들의 무역 흑자는 연간 30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들 국가의 국부 펀드 규모도 오는 2020년까지 15조 달러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다. 오일 달러의 미국 자산 매입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특히 ‘중동의 뉴욕’으로 불리는 두바이의 뉴욕 부동산 ‘쇼핑’은 광적이다.두바이 정부 소유의 투자사 두바이월드 자회사인 이스티트마르가 2005년 사무용 건물인 ‘450 렉싱톤 애비뉴’를 6억 달러에 매입한 것은 신호탄일 뿐이었다. 이스티트마르는 곧이어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펜트하우스로 유명한 ‘에섹스 하우스’와 ‘230 파크 애비뉴(헬름스리 빌딩)를 각각 4억4000만 달러와 7억500만 달러에 사들였다. 또 280 파크 애비뉴와 티커 보커 호텔, W호텔 유니언 스퀘어 등이 잇따라 두바이 손에 넘어갔다. 지난해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이 두바이 투자사에 인수됐다.두바이는 해외 부동산 매입을 통해 원유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뉴욕의 유서 깊은 대표 건물을 사들임으로써 두바이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인다는 포석이다.일본 자본과 달리 두바이 아랍 상인들의 부동산 거래는 아직까지 성공적이란 평가다. 두바이는 지난해 11월 280 파크 애비뉴를 13억5000만 달러에 매각한데 이어 한 달 뒤 230 파크 애비뉴를 11억5000만 달러에 팔았다. 이들 두 건물에서 모두 5억9500만 달러의 차익을 챙긴 셈이다.오일 달러의 뉴욕 접수는 미국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다. 이러다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까지 팔리는 것 아니냐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하지만 해외로 빠져나갔던 달러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란 진단도 있다. 미국의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로 해외로 유출됐던 달러가 미 국채 등 미국 내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들어오는 소위 ‘달러 리사이클링(재활용)’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하며 달러 가치를 유지하는 버팀목이란 얘기다. 뉴아메리카재단의 국부 펀드 전문가인 더글러스 레디커는 “원유 등 상품 가격 급등을 통해 엄청난 양의 달러가 중동 등에 유입되고 있다”며 “이들 국가들이 보유한 달러가 미국 국채나 부동산 매입 등으로 리사이클링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지적했다.유병연·한국경제 기자 yooby@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