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륙 덮친 ‘I의 공포’
‘I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국제 유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Inflation) 공포’다. 월가를 한동안 지배했던 ‘R의 공포(경기 침체: Recession)’는 쑥 들어갔다. 경기 침체보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미국 경제의 가장 큰 변수로 등장했다는 의미다.지금처럼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을 계속할 경우 미국 경제도 타격을 입을게 분명하다. 현재까지 국제 유가가 오른 것만으로도 미 경제성장률을 1.5%포인트 갉아 먹고 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이미 올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0%포인트 하향 조정했다.그러다 보니 문제가 되는 게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성장이 정체되는 상태에서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지난 1970년대 이후 30년 만에 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이뿐만 아니다. 고유가는 이미 개인 생활을 상당히 바꿔 놓고 있다. 휘발유 값 상승은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 자동차 운행거리를 줄이고 있다. 휴가를 취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가 하면, 가능하면 ‘쓰지 말자’는 허리띠 졸라 매기도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으로 중·하층이 휘청거렸다면 고유가 파문은 중산층의 생활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현재로선 ‘I의 공포’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국제 유가 상승이 투기적 수요가 아닌, 수급 불균형에 따른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국제 유가도 하락할 것으로 전망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찌됐건 앞으로 상당 기간은 ‘I의 공포’가 화두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서브프라임 파문으로 휘청대던 미국 경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침체는 없거나 있더라도 짧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각종 경제지표가 그런대로 괜찮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R의 공포’는 빠르게 가시고 뉴욕 증시도 탄탄한 흐름을 보였다.‘R의 공포’가 잦아진 틈을 ‘I의 공포’가 채우고 있다. ‘I의 공포’를 촉발한 매개는 국제 유가다. 지난 5월 하순 배럴당 135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던 국제 유가에 대해선 현재 투기적 수요가 아닌, 수급 불균형이 주된 상승 요인인 만큼 쉽게 하락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6월 중 배럴당 150달러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물론 하반기 유가는 하락세를 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월가의 이코노미스트 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월 말 국제 유가는 104.95달러를 기록한 뒤 올 연말에는 93.24달러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다른 투자은행들도 배럴당 150달러를 기점으로 하향 안정세를 기록할 것이란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망’일 뿐이다. 현재로서는 국제 유가가 언제 하락할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전문가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최근의 국제 유가 상승은 거품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진단을 내렸다. 따라서 고유가가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뉴욕타임스도 “최근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짐에 따라, 특히 안전 자산인 미 국채 등 채권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며 “이제 투자 선택의 기준은 경기 침체가 아닌 인플레이션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메릴린치가 최근 월가의 펀드매니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부분은 앞으로 12개월 동안 인플레이션 압력이 점점 가중될 것이라며 인플레이션 공포가 월가를 지배할 것으로 내다봤다. 브로커리지 회사인 에드워즈 존스의 투자 전략가인 마리오 데로스는 “지금 월가의 이슈는 경기 침체에서 인플레이션으로 확실하게 이동 중”이라며 “이른바 I의 공포가 한동안 화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인플레이션 상승은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물가가 오르면 똑같은 돈을 갖고도 살 수 있는 물건이 적어진다. 수입이 늘지 않으면 물건 구입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진다. 미국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달한다. 소비가 위축되면 성장률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I의 공포가 지속될 경우 하반기 회복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되던 미국 경제의 회복 시기도 더뎌질 수밖에 없다.이런 우려는 이미 경제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라지어 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은 “국제 유가가 연간 기준으로 배럴당 10달러 오르면 미 경제성장률은 0.5%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며 “최근 유가 급등으로 인해 미국의 올 경제성장률은 기존 전망치를 1.5%포인트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앞으로 유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경제는 계속해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FRB는 이런 우려를 이미 반영했다. 최근 올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1월의 1.3∼2%보다 1%포인트 낮은 0.3∼1.2%로 하향 조정한 것. 이렇게 보면 미국 경제는 하반기에 회복하더라도 1% 안팎의 저성장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성장은 정체되고 물가만 계속해서 오른다면 경제는 사면초가에 빠진다. 다름 아닌 스태그플레이션이다. FRB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지난 1970년대 세계 경제를 괴롭혔던 스태그플래이션이 재등장했다”며 “지금 현명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경제 회복에 15년이 걸렸던 1970년대보다 더 끔찍한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I의 공포 시대를 맞아 미국인들은 지금 ‘휘발유와 전쟁’ 중이다. 핵심은 안 쓰거나 덜 쓰자다. 자동차 천국인 미국에서는 휘발유 값 급등이 곧바로 자동차 운행과 연결된다. 현재 전국 휘발유 값 평균 소매가격은 갤런(3.7리터)당 3.88달러. 작년 이맘때보다 65센트나 올랐다. 그러니 가능하면 자동차 운행을 줄일 수밖에 없다.이는 운행 거리 축소로 나타났다. 미 교통부는 지난 3월 미국인들의 자동차 운행 거리는 작년 동기보다 4.3%인 110억 마일이 줄었다고 발표했다. 운행 거리가 줄기는 지난 1979년 이후 처음이다. 이런 현상은 최근 들어 더욱 두드러진다. 현충일에 해당하는 미국의 메모리얼데이(5월 26일)는 여름 휴가철의 출발점이다. 그런데도 메모리얼데이 직전 주의 휘발유 판매는 작년 동기보다 7% 감소했다. 미 에너지국은 올 휘발유 판매량이 지난 1991년 이후 처음으로 0.6%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여름휴가를 취소하거나 줄이는 사람도 늘고 있다. 메모리얼데이 휴가를 취소한 사람은 10%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장거리 여행보다는 단거리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갤런당 2달러대에 익숙한 미국인들이 4달러 시대를 살기 위해선 줄이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개인들의 휘발유 안 쓰기는 더 치열하다. 캘리포니아 주의 코리 아스무스는 최근 4800달러짜리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자동차 대신 출퇴근을 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1주일에 100달러 이상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아스무스 씨의 계산이다. 시카고에 사는 은퇴 노인인 플로리안 바이아라스는 아예 폰티악 승용차를 처분했다. “소형차를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기름이 많이 드는 중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가격은 지난 1년간 17.5% 떨어진 반면 소형차 값은 2% 올랐다.그런가 하면 기름 값 상승에 타격을 받는 항공사들도 난리다. 미국 항공사들은 최근 일제히 국내선 항공료를 올렸다. 네바다의 볼더시티, 애리조나의 그랜드캐니언, 코네티컷의 뉴헤이븐 등 30개 가까운 도시에서는 비행기 운항이 중단됐다. 400여 개 도시에서는 항공기 운항 편수가 줄었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은 3095편, 피츠버그 공항은 1925편, 보스턴 공항은 1704편, 워싱턴DC의 댈러스 공항은 1458편이 1년 전보다 감소했다.하영춘·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