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티의 경제학

지난 4월 굴지의 글로벌 반도체 장비 업체와의 특허 소송에서 국내 한 중소기업이 승소해 화제가 됐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견됐던 이 소송의 주인공은 국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검사 전문 업체 파이컴과 미국 폼팩터사다.파이컴과 폼팩터의 특허 분쟁은 파이컴이 400억 원 이상을 투자해 개발한 멤스카드로 2003년 프로브카드(반도체의 동작을 검사하기 위해 반도체 칩과 테스트 장비를 연결하는 장치) 시장에 진출하자 2004년 2월 폼팩터사가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파이컴은 특허 무효 소송으로 맞섰고 폼팩터의 특허 4건 중 2건은 작년 9월 대법원에서 무효 판결을 받았다.결국 4월 말 대법원이 다른 한 건도 추가로 무효 판결함에 따라 폼팩터가 제기한 4건의 특허 중 3건이 최종 무효 판결을 받아 그 효력을 잃게 됐다. 파이컴 측은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에 선정된 자사의 프로브카드 제조 기술의 독창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나머지 소송에서도 승리가 유력해졌다고 밝혔다.이 회사는 그간의 특허 소송 부담을 털고 올해 반도체 멤스카드 부문에서만 전년 대비 40% 성장한 700억 원대 이상 매출을 달성하고 액정표시장치(LCD) 부문에서도 400억 원의 매출을 올려 1000억 원대 매출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반면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원천 기술로 막대한 로열티를 벌어들이고 있는 퀄컴은 궁지에 몰렸다. 지난 2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노키아가 퀄컴의 3가지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린 것. 또 영국 특허법원도 노키아가 퀄컴의 2가지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이와 관련, 이승혁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2005년 시작된 노키아와 퀄컴 사이의 특허 소송에서 최근 노키아에 대한 유리한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며 “국내 휴대전화 업체들에는 긍정적인 뉴스”라고 내다봤다. 그는 “WCDMA 휴대전화 시장에서 퀄컴의 기존 입지가 약화될 가능성이 많고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휴대전화 업체들은 이를 통해 퀄컴으로부터 과거보다 유리한 계약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퀄컴은 CDMA 기술과 관련 3200개 이상의 특허를 가지고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특히 2006년 기준 전체 매출 75억3000만 달러 중 기술 라이선스 비중이 37%에 달한다.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전화 단말기 한 대당 5~20달러를 로열티로 받아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키아와의 특허 분쟁의 예처럼 최근 퀄컴은 여러 관련 소송에서 불리해지고 있는 까닭에 일각에선 ‘특허로 흥한 자, 특허로 망하나’하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이처럼 특허는 한 회사는 물론 산업 전반의 구조를 흔들 수 있을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보다 많은 특허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사실 한국은 이미 양적인 부분에서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특허 강국’이다. 1997년 특허청 개청 당시 2만5000여 건에 불과하던 산업재산권 출원 규모가 2007년에는 37만 건에 육박해 세계 4위의 출원 대국으로 성장했다. 특히 1984년 10건에 불과하던 국제특허협력조약(PCT)특허출원도 2006년에는 5835건으로 세계 5위에 올랐다. 2007년엔 7000여 건을 달성해 프랑스를 제쳤다. 또 2006년 기준으로 미국 특허 출원과 특허를 주도하는 3개국(미국 일본 유럽)의 특허청에 모두 등록돼 있는 특허를 의미하는 삼극 특허 역시 4위에 올라 있다.하지만 특허권 등의 사용료 수지는 아직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2003년 22억6000만 달러에서 2004년 25억8000만 달러, 2005년 26억 5000만 달러로 규모가 커졌다.이런 상황은 개별 기업으로 눈을 돌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허에 대해 발 빠르게 대응하기 시작한 미국 등 해외 업체에 비해 원천 특허가 부족한 탓이다. 여기에 특허 소송만으로 먹고 사는 ‘특허괴물(Patent troll)’까지 나타나면서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다행스러운 것은 2006년 특허권 사용료 수지가 24억8000만 달러 적자로 전년에 비해 2억 달러가량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특허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들이 특허 전략을 ‘양’에서 ‘질’ 위주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특허청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특허 출원 건수는 2005년 1만7813건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2006년 1만1471건까지 감소했다. 특허 출원 건수 2위를 달리고 있는 LG전자의 특허 출원 감소세는 더 가파르다. 같은 기간 1만3330건에서 5932건으로 출원 건수가 60%가량 줄어들었다. 하이닉스반도체 삼성SDI 현대기아자동차 등도 특허 출원 건수가 감소하는 추세다. 상위 10개 기업을 기준으로 2005년 5만2212건에 달했던 특허 출원 건수가 2006년 3만6750건으로 줄었고 2007년에는 3만 건 아래로 떨어졌다.이는 기업들이 R&D 단계에서부터 선택과 집중 전략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예전엔 3~4개로 쪼개서 내던 특허들을 ‘묶음 특허’로 출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네덜란드 필립스처럼 원천 기술을 많이 갖고 있는 기업들은 연간 특허 출원 건수가 3000건 정도에 불과하지만 누구도 특허 경쟁력이 약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LG전자의 경우 특허 출원 건수는 줄었지만 특허로 얻는 수입은 2006년 6000만 달러, 2007년 1억 달러 등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특허 관련 인력이 최근 5년 새 2배가량 늘어나 현재 400명에 달한다. 즉, 국내 특허 출원 건수가 줄어든 것은 ‘돈이 되고 미래 가치가 있는’ 특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한 대형 전자 업체 특허 담당 임원은 “많게는 30~40%씩 특허 출원 물량을 줄이고 있다”며 “활용되지 않는 기술은 특허 유지비용만도 무시할 수 없는 등 문제점이 많아 활용 가능한 기술 위주로 질적 관리를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특허에 대한 보상 체계가 바뀐 것도 특허 출원 건수가 줄어든 이유의 하나로 분석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에는 특허 출원에 따른 보상금 액수가 특허로 얼마나 돈을 벌어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R&D 인력들도 이 같은 원칙을 잘 알기 때문에 특허 출원 건수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아울러 기업들은 국내 특허 대신 해외 특허에 집중하고 있다. 상품 소비가 많은 국가에 특허 등록이 돼 있어야 현지 기업들과의 특허 기술 교환이 쉽기 때문이다. 또 해외에서 발생하는 특허 분쟁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삼성전자는 미국에서 지난해 2500여 건의 특허를 등록, IBM에 이어 기업 특허 2위를 달리고 있다. 이 회사가 미국 기업특허 2위에 오른 것은 2006년부터다. LG전자도 미국에서 1200여 건의 특허를 등록, 상위권에 랭크돼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핵심 특허의 경우 국내와 미국 유럽 등에 동시 출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