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가는 공교육

장면1. 지난 5월 20일 강남구 삼성2동 언주중학교. 여느 때 같으면 학교가 텅 빌 시간인 오후 6시, 교실에 모여 앉은 학생들의 수업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현대고 현직 역사 선생님인 양택관 교사가 10여 명 안팎의 중학생들에게 사회 과목 심화학습을 강의한다. 수강료는 일반 학원의 4분의 1 수준. 강남교육청이 사교육비 절감과 공교육 부활을 내걸고 시작한 방과후 거점학교 프로그램의 일부다. 4월 말 중간고사에서 1기 학생들의 성적이 올랐다는 소문이 나면서 2기에는 신청자가 더 몰렸다.장면2. 강남구청이 운영하는 인터넷 수능 방송의 인기도 계속 치솟고 있다. 연회비 2만 원만 내면 대치동 학원가 최고 강사들의 명강의를 인터넷으로 모두 들을 수 있다는 게 인기 요인이다. 대학 입시에서 비중이 커진 수시전형을 준비할 수 있도록 논술과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 등을 담은 185강짜리 초대형 강좌도 6월 초 선보인다. 교재도 인터넷에 올려놓은 포터블도큐먼트포맷(PDF) 파일을 내려 받으면 돼 부담이 없다. 미국 등 해외에 있는 학생들의 요청이 많아져 최근 해외에서도 회원 가입과 수강료 결제가 가능하도록 했다.이들은 모두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강남이 ‘공교육 1번지’로 새롭게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국내 최고 수준인 강남의 뛰어난 교육 인프라는 ‘공교육 혁명’에서도 한발 앞서나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강남교육청이 방과후 거점학교를 처음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이다. 반포중 영동중 대치중 중동중 언북중 등 5개 중학교를 선정해 정규 수업이 끝난 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진행하는 ‘학원식 과외’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재학 중인 학교와 상관없이 원하는 수업을 신청해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거점학교’라는 이름이 붙었다.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후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논술 등 필요한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해 들으면 된다. 학원 방식을 채용해 종합반과 단과반으로 묶어 골라 들을 수 있게 하고, 개설 강좌도 수준에 맞춰 여러 개로 나누었다. 성화숙 강남교육청 장학사는 “한 과목을 수준별로 5단계로 세분화한 학교도 있다”고 말했다.방과후 거점학교 프로그램은 수강료가 일반 학원의 25~30%로 저렴한데다 수업이 알차다는 소문이 나면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2월까지 매월 3000여 명이 참여했다. 강남교육청은 이를 바탕으로 지난 3월 1학기 개강과 함께 기존 거점학교에 언주중 역삼중 개포중을 추가해 8개로 늘렸다.거점학교 프로그램에는 운영학교 교사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 방송 강사 등이 280여 명이 강사로 참여한다. 수능 출제 위원을 맡았던 교사도 있고, 교과서와 참고서를 집필한 교사들도 있다. CNN 뉴스 청취반을 맡고 있는 언주중 염혜선 교사는 “원하는 학생들만 참여해 수업 열기가 매우 뜨겁다”며 “정규 수업에서는 시간에 쫓겨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깊이 있게 설명하고 토론할 수 있어 학생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강남교육청의 성공 사례가 알려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이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 시내 10개 교육청은 이미 지역 내 한 학교씩을 선정해 방과 후 거점학교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지방에서도 전화 문의와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강남 지역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교육 인프라가 확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지난 2004년 문을 연 강남구청의 인터넷 수능 방송은 사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지방 고등학생들에게 이미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현재 유료 회원만 16만 명에 달한다. 연회비 2만 원으로 강남 지역 유명 학원 강사들의 강의를 전국 어디에서나 손쉽게 수강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강남구청 인터넷 수능 방송은 초기에는 수능 시험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러다 2006년부터 대학 입시에서 내신 성적의 비중이 커지면서 내신을 강화했고 지난해부터는 논술 서비스도 시작했다. 강우택 강남구청 인터넷수능방송팀 팀장은 “수시 전형에 대비할 수 있도록 논술과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 등을 다룬 185강 규모의 대형 강좌를 6월 초 시작한다”며 “인터넷 수능 방송만 들어도 수시 전형 대비에 지장이 없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현재 인터넷 수능 방송에서는 수능과 내신, 논술, 학습법까지 6200여 개의 다양한 강좌를 제공한다. 등록 회원을 지역별로 나누면 지방이 70%, 강남을 제외한 서울 지역 26%, 강남 4% 등이다. 강 팀장은 “지난해 50만 명 수준이던 일반 회원 수가 올 들어 67만 명까지 늘었다”며 “회원 증가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고 말했다.강남구청 인터넷 수능 방송에 출연하는 강사들은 모두 강남 지역에서 활동하는 현역 학원 강사들이다. 사교육비 저감과 균등한 교육 기회 제공이라는 취지에 공감한 경우도 있지만 인터넷 수능 방송 출연은 강사들의 경력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 강남구청 인터넷 수능 방송에서 인기를 얻어 메가스터디 등 대형 사교육 업체로 스카우트돼 간 사례도 적지 않다. 강 팀장은 “강사들의 일정에 맞추다 보면 새벽 2시까지 촬영이 이어지는 일도 많다”고 말했다.강남구청 인터넷 수능 방송은 회원으로 등록하지 않고도 강좌별로 2강까지 무료로 수강할 수 있으며 정회원으로 가입하면 PDF 파일로 된 교재를 무료로 내려 받을 수 있다. 지난 5월 20일부터는 해외 거주자의 가입 및 수강료 결제도 가능해 졌다. 강 팀장은 “해외에서의 접속률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인터뷰│이경복 강남교육청 교육장이경복 강남교육청 교육장은 방과후 거점학교 프로그램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지난해 9월 서울교육청 교육정책국장으로 있다 자리를 옮겼다. 이 교육장은 “강남이라고 모두 잘사는 것은 아니다”라며 “중산층 이하 가정에서도 큰 부담 없이 공부를 시킬 수 있도록 강남을 공교육 1번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의 실력 있고 열정 넘치는 교사들을 활용하면 사교육과의 경쟁에서 밀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자신했다.학생과 학부모들이 뭘 원하는지 여러 차례 철저하게 조사했다. 학부모들은 저녁 시간에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원했다. 실제로 그 시간에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아이들이 할 일이 없다. 또 학생들은 매일 보는 선생님 말고 다른 분들의 강의도 듣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사와 방송 강사, 대학 강사 원어민 보조 교사로 인력 풀을 넓혀 구성했다.정면 경쟁을 피해서는 안 된다. 학부모들은 금방 알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한 신뢰를 되찾아 오려면 반드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중간고사 이후 수강 학생이 크게 늘었다. 도움이 된다는 게 입증됐기 때문이다. 재수강률도 82%에 달한다.전담 인력을 채용해 학생들의 출석 여부 등을 전화와 문자로 알려준다. 선생님들이 직접 전화 상담에도 나선다. 이런 부분을 학부모님들이 굉장히 좋아한다. 강남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아이들을 보내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 지하철이 바로 연결돼 문제없으니 받아 달라는 거다. 큰 문제없으면 다 받고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