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전자 꼴찌 업체들의 굴욕

‘산요전기가 마침내 무대에서 사라지나.’지난 4월 28일 도쿄 증시에선 산요전기가 마쓰시타전기에 흡수 합병될 것이란 소식이 단연 화제였다. 이날 일본의 최대 신문인 요미우리가 1면에 단독 보도한 내용이다. 경영난을 겪고 있는 산요전기의 대주주들이 독자 회생을 포기하고 마쓰시타에 주식을 매각할 것이란 게 골자다. 보도대로라면 지난해 창업 60주년을 맞았던 산요전기는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일본의 꼴찌 전기·전자 업체들이 고전 중이다. ‘가전 왕국’이란 명성답게 일본엔 전기·전자 업체들이 수없이 많다.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소위 ‘백색가전’을 만드는 회사만 10개 정도 된다. 나름의 기술력과 브랜드 가치로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다.그러나 한국 대만 중국 등의 전기·전자 업체들이 약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비슷한 품질 수준에서 싼 가격으로 제품을 쏟아내면서 웬만한 경쟁력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더구나 제품 수명 주기가 짧고 가격 경쟁이 심한 디지털 가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하위 전기·전자 업체들 중엔 나가떨어지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어느새 일본 전기·전자 업계엔 ‘1, 2등이 아니면 죽는다’는 냉혹한 시장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선택과 집중’이 새삼 화두다. 일본의 꼴찌 전기·전자 업체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이제 산요전기 없어지나= 마쓰시타전기와 산요전기의 합병설은 산요전기 쪽에서 흘러 나왔다. 산요전기의 대주주인 미쓰이스미토모은행 골드만삭스그룹 다이와증권SMBC 등 금융 3사가 회사의 근본적인 경영 혁신을 위해 재무 구조가 튼튼한 마쓰시타와 제휴 또는 합병하는 방안을 긍정 검토하고 있다는 것. 이들 대주주 금융 3사는 산요전기가 독자적으로 회생하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마지막 방법은 잘나가는 기업과 합병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산요전기가 재무 구조만 안정되면 어느 정도 채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게 대주주 측의 판단이다. 충전지 등 분야에선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주주인 금융 3사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산요전기의 주식(66.9%)을 마쓰시타에 모두 양도하는 방안까지 들고 협상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업계에선 두 회사의 제휴가 궁극적으로 합병을 겨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양사의 합병이 실현되면 일본에선 처음으로 전기·전자 부문 대기업 간 경영 통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두 회사의 매출액(2008년 3월 기준)을 합치면 약 11조100억 엔이다. 히타치제작소(약 10조 엔)를 누르고 일본 내 최고 전기·전자 메이커로 부상할 수 있는 규모다.1947년 창업한 산요전기는 일본 내 전기·전자 업체 순위 9위다. 백색가전과 디지털카메라 TV 등 다양한 제품군을 갖고 있다. 하지만 2004년 이후 3년 연속 적자를 냈다.급기야 2006년엔 재무 구조 개선을 위해 금융 회사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 금융사 관리를 받고 있다. 이때 증자에 참여한 골드만삭스와 다이와증권SMBC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등이 지금의 대주주다. 그나마 지난해 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 결산에선 흑자 전환이 예상된다. 금융사 관리 체제에서 휴대전화 사업을 매각하고 백색가전을 축소하는 등 ‘선택과 집중’을 한 덕택이다.물론 산요전기와 마쓰시타전기의 합병에는 걸림돌이 많다. 산요가 백색가전과 반도체에서 여전히 고전하고 있는 데다 마쓰시타와 중복되는 생산·판매 거점이 많기 때문이다.◇창업 100년 히타치도 사업 포기= 시장 경쟁에서 패배해 백기를 드는 회사는 산요전기만이 아니다. 품목별로 시장점유율 랭킹에서 하위 그룹에 속해 있는 회사들의 공통된 현상이다.히타치제작소도 그중 하나다. 2010년 창업 100주년을 맞는 이 회사는 한때 일본을 대표하는 전기·전자 업체였다. 그러나 높은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느려 국내외 경쟁에 밀리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히타치는 올 1분기(1~3월)에만 슬림형 TV의 판매 부진 등으로 700억 엔(약 70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결국 최근엔 반도체 사업 포기를 선언했다. 히타치는 지난달 말 D램 반도체를 생산해 온 엘피다메모리의 지분 9.9%를 전량 매각하기로 했다. 엘피다는 히타치제작소와 NEC가 D램 사업을 통합해 발족한 합작사다. 최대 주주인 히타치는 주력 사업과 관련성이 약해졌다는 이유 등으로 보유 주식을 처분해 반도체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히타치는 지난해 개인용 컴퓨터(PC) 생산에서도 전면 철수했다. 업무용 PC 생산은 진작에 미국 휴렛팩커드(HP)에 위탁하고 있다. 이어 가정용 PC 생산과 신기술 개발도 완전 중단한 것이다. 정보기술(IT) 기기 분야의 과당경쟁에 따른 경쟁력 저하로 채산성 확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미쓰비시전기도 휴대전화 개발과 생산에서 최근 완전 철수했다.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1억 명을 돌파하는 등 일본 내 이동통신 시장이 포화인 상태에서 돈을 벌기가 어려워진데 따른 것이다. 미쓰비시의 휴대전화 국내 출하 대수는 한때 상위 5위 안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에는 약 300만 대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휴대전화 매출은 연간 1000억 엔 이상이지만 수년간 적자를 내고 있다. 미쓰비시는 휴대전화 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경영 자원을 수익력이 높은 부문에 집중 투입할 계획이다.일본 내 평판 TV 업계 6위인 일본빅터(JVC)도 올여름 일본 내 TV 사업에서 전면 철수하기로 했다. 대신 미국과 유럽 시장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빅터의 국내 TV 사업 포기는 과열 경쟁에 따른 가격 하락으로 채산성을 맞추기 힘들다는 판단에서다.빅터는 지난해 세계 시장에서 100만 대 정도의 액정표시장치(LCD) TV를 팔았다. 이 중 일본 내 판매는 30만 대에 그쳤다. 시장점유율 2.9%로 샤프와 마쓰시타 소니 도시바 히타치에 이어 6위였다.◇1, 2등 아니면 죽는다= 일본 전기·전자 업계의 하위 업체들이 잇따라 사업 정리에 나선 것은 제품의 디지털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다. 가전제품이 디지털화하면서 아날로그 시대에 비해 연구·개발(R&D)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또 인수·합병(M&A)을 통해 대형화한 유통 업체들이 강해진 협상력을 무기로 가격 인하 압력을 넣고 있는 것도 하위 업체들을 괴롭히는 요인이다.이미 일본 전기·전자 업계에선 상위 1,2위가 아니면 시장에서 도태된다는 게 정설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해 전국 4500여 개 전자제품 양판점을 대상으로 디지털 전자제품의 시장점유율을 조사한 결과 1, 2위 업체의 점유율은 계속 높아진 반면 3위 이하의 점유율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디지털비디오디스크(DVD) 리코더는 상위 1위인 마쓰시타전기(35%)와 2위인 샤프(25%)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60%에 달했다. 전년에 비해 20%포인트 올라간 것이다. MP3도 상위 1,2위인 애플(50%)과 소니(28%)의 점유율이 78%로 12%포인트 상승했다. 디지털 전자 분야에서 상위 1,2위의 지배력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은 신제품 개발 주기가 짧고 가격 인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선 설비 투자와 가격 인하 경쟁에서 버틸 수 있는 시장 선도 기업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또 소비자들이 브랜드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도 큰 요인으로 꼽힌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