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서 국정원 기조실장 변신 김주성 풀 스토리
지난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세종문화회관 직원들은 두 차례 놀랐다. 10일 외부에서 전해진 깜짝 뉴스로 놀란 가슴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튿날엔 직장 내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먼저 10일 청와대가 발표한 새 정부 인사에서 김주성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국가정보원의 기획조정실장에 전격적으로 발탁됐다는 게 깜짝 뉴스 1탄. 국정원 기조실장은 연간 8000억~9000억 원으로 추산되는 국정원 전체 예산과 조직 관리를 책임지는 핵심 요직. 역대 대통령들이 이 자리에 대개 ‘자기 사람’을 기용해 왔다는 점에서 이 자리의 중량감을 쉽게 알 수 있다. 국정원 기조실장에 누가 앉느냐는 바로 국정원 개혁의 방향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평가된다. 이런 자리에 느닷없이 문화 공연 단체의 사장이 가게 됐으니 직원들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청와대의 공식 발표가 나기 전까지 이 사실을 감지한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인사가 난 다음날 오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주성 사장의 이임식에서도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2005년 12월 취임한 후 이날까지 약 2년 4개월간 직원들과 동고동락을 함께한 김 사장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사랑하는 세종문화회관 가족 여러분!”으로 시작된 이임사를 읽어가던 김 사장의 목소리 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중간쯤 되는 부분. “뒤돌아보면 세종문화회관과 함께한 지난 2년여간의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노사 화합을 추진하며”라는 대목에서 김 사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자위가 붉게 물들더니 끝내 김 사장은 굵은 눈물방울을 보이고 말았다. 이임식에 참석한 직원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던 ‘원칙’과 ‘뚝심’의 대명사로만 여겨졌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이 눈물을 훔치고 “나도 원래는 부드럽고 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소리치고 혼내서 미안하다”며 속내를 털어놓자 직원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세종문화회관의 한 직원은 “워낙 강단 있는 분이어서 이임식에서 눈물을 보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경북 봉화 출신으로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김 실장은 1974년 코오롱상사에 입사한 후 2004년 그룹 부회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코오롱그룹에서만 30여 년을 근무한 전문경영인이다. 코오롱은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국회 부의장이 대표이사까지 지낸 회사. 이곳에서 김 실장은 회장 비서실장, 기획조정실장, 구조조정본부 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의 아들인 이웅열 회장이 취임한 이후 코오롱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특히 구조조정과 관련한 일을 많이 맡아 그룹 안에서 ‘해결사’로 통했다고 한다. ‘해결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김주성을 보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1994년에는 노사문제가 심각했던 코오롱 구미공장장으로 근무하며 노조원의 파업 찬반투표를 2년 연속 부결로 이끄는 등 노사문제에 남다른 역량을 발휘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그룹 구조조정 본부장으로서 사업 구조를 성공적으로 재편하기도 했다.코오롱을 떠난 후에는 전문경영인에서 전문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의 사장으로 변신해 당시에도 화제를 불러 모았다. 1978년 개관한 이후 세종문화회관의 사장은 줄곧 공무원이나 예술인이 맡아 왔으며 전문경영인 출신 사장은 김 실장이 처음이었다.김 실장을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영입한 주인공은 바로 이명박 대통령(당시 서울시장)이었다. 그의 강한 업무 추진력을 높이 산 것이다.‘예술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장 역할을 잘 할 수 있겠나’라는 취임 당시의 의문부호(?)가 느낌표(!)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뚝심’을 바탕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종문화회관의 면모를 하나하나 바꿔 나갔다. 우선 각종 회의 및 행사장으로 사용되던 컨벤션센터를 고급 실내악 전용 홀로 꾸몄고 440석 규모였던 소극장을 639석 규모의 뮤지컬 연극 오페라 전문 공연장으로 리모델링했다. 세종문화회관 인근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점심시간 때 선보인 공연 강의 및 연주 프로그램 ‘세종예술아카데미’도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단돈 천 원으로 유명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한 ‘천원의 행복’도 큰 성공을 거뒀다. 관람료는 천원이지만 공연 수준은 10만 원 이상이 되게끔 꾸며 공연 예술은 비싸다는 선입견을 없애고 공연 문턱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공연 단체에 널리 퍼져 있던 소위 공짜표를 없앴다. 이뿐만 아니다. 예술단 및 단원에 대한 평가제를 도입해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으며 상호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예술단 간 격려금도 차등 지급했다.이런 김 실장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는 어떨까. 세종문화회관 홍보팀의 한 직원은 “추진력 하나는 정말 끝내 주시는 분이죠. 또 기억력이 워낙 비상해 결재를 받으러 갈 때면 언제나 긴장해야 합니다. 어떤 걸 물어올지 모르니까요”라고 김 실장을 기억했다. 이 직원은 또 “김 사장님 말씀엔 특유의 레퍼토리가 있어요. 예를 들면 ‘내말이 맞나, 틀리나?’ ‘네가 주인이냐, 종이냐?’ ‘네 돈이면 이런 식으로 쓰겠느냐’ 등인데 간단명료하면서도 주인의식을 유달리 강조하는 말투를 즐겨 사용하셨죠”라고 덧붙였다. 한 팀장급 직원의 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마디로 철두철미한 분이셨죠. 워낙 원칙에 충실하셨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아랫사람 처지에서는 함께 모시고 일하기 힘든 분이죠. 대충 눈감고 봐주는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혼도 많이 나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린 부분이 없어요. 다 지적할 만한 것들만 끄집어내 지적하고 꾸중하신 것이란 얘기죠. 지나고 보니까 일에 대해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팀장은 “특히 김 사장이 취임하신 후 불투명했던 대관 프로세스라든지 깨끗하지 못했던 공연 단체의 자금 관리 부분이 특히 많이 투명해졌다”며 “공익성과 수익성을 함께 도모하면서 세종문화회관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은 김 사장의 큰 업적”이라고 치켜세웠다.코오롱그룹에서 김 실장과 함께 일했던 임추섭 경영전략팀 이사는 “김 실장은 내가 느끼기에는 구조조정 전문가라기보다 원칙주의자”라며 “등에 땀이 날 정도로 혼이 날 때도 있었지만 곧바로 풀고 뒤끝이 없었다”고 말했다.이 대통령이 김 실장을 중용한 것은 측근인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와 함께 국정원 개혁의 ‘쌍두마차’로 포진, 국정원 내부 기강을 다잡고 방만한 구조와 운영을 개혁하겠다는 의지의 표출로 읽힌다. 한 국정원 관계자도 “기업인 출신인데다 세종문화회관을 성공적으로 경영했던 김 실장이 임명된 것은 조직 관리와 예산 사용의 투명성 제고를 바라는 청와대의 뜻이 반영돼 있는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자신의 기조실장 발탁에 국정원 직원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말에 김 실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직 장악에 대해 걱정하지만 조직의 본질은 어디나 같다고 본다. 코오롱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올 때도 전혀 모르고 왔지만 열흘 만에 노조의 플래카드를 떼어냈고 대화를 재개했다”고 말했다. 또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하겠지만 국정원에서 줄 서기나 조직 내 정치를 없앨 생각이다. 조직 안에 정치가 횡행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와 함께 “국정원 직원들은 내 스타일을 미리 파악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국정원에서 앞으로 맡게 될 역할에 대해선 “구조조정이라고 하면 자르는 것만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정한 구조조정이란 조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느 조직을 운영하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인정받고 정직하고 바른 마음으로 업무를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김재창 기자 changs@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