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유 시장에서 1973년은 특별한 해로 기록된다.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한 이 해를 기점으로 시장의 패권은 메이저 석유 회사에서 산유국들로 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 결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며 비산유국들은 중동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1970년대 초반까지 국제 유가의 변동이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초대형 석유회사들이 고시가격을 정했기 때문이다. 중동의 산유국들이 세율과 가격 인상을 위해 노력한 결과, 70년 배럴당 1.8달러이던 것이 73년 3.01달러로 두 배가량 오르기는 했지만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하지만 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대역전됐다.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등 서방 국가에 대해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 고시가격은 배럴당 5.12달러로 급등한 데 이어, 이듬해 1월 1일에는 11.65달러까지 치솟았다. 불과 2개월 만에 무려 네 배나 오른 것이다.1차 오일 쇼크를 통해 중동의 산유국들은 자신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가격을 올리지는 않았다. 가격 인상이 경기 침체와 이에 따른 석유 소비 감소로 이어져 자국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국제에너지기국(IEA)을 설립하는 등 또 다른 오일 쇼크에 대한 선진국들의 대비도 석유 가격 안정화에 기여했다. 78년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12.7달러로 1차 오일 쇼크 당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한동안 안정적이던 원유가는 78년에 다시 한 번 요동쳤다. 2차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다. 1차 쇼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원인은 비경제적인 것이었다. 78년 12월 이란에서 회교혁명이 일어나면서 석유 수출을 전면 중단한 것이다. 당시 이란의 생산량은 하루 600만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 만큼 이란의 수출 중단은 석유 공급량을 크게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2차 오일 쇼크는 정치적인 이유와 겨울이라는 계절적 요인이 맞물리면서 가격을 밀어올렸다. 79년 12월 배럴당 가격은 24달러로 1년 만에 갑절로 불어났다. 가격 안정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증산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며 혁명에 성공한 이란이 79년 3월 생산을 재개했지만 생산량은 종전에 비해 절반에 불과했다. 석유 소비국들이 비축유를 채우기 위해 수입을 늘린 데다 국제 투기 세력이 사재기를 해 충격이 확대됐다.1980년 초반에도 세계 경제는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보다 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급이 줄었다. 양국은 서로의 석유 시설을 공격했고 유조선의 운행을 막았다. 그 결과 한때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42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80년대 중반에 들어 석유 가격은 안정을 찾아갔다. 전쟁이 끝난 데다 북해 등 비중동 지역의 생산량이 늘면서 수급이 균형을 이뤘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동 산유국들이 갈등을 빚으며 결속력을 잃어간 것도 가격 하락을 부추긴 요인이다. 85년 OPEC이 증산을 결정하면서 70년대 이후 줄달음치던 원유 가격은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85년 27달러이던 두바이유는 86년 7달러까지 급락하며 평균 13달러 수준으로 내려앉았다.80년대 후반, 폭락에 놀란 OPEC은 전열을 정비해 나갔다. 86년 8월 대규모 감산을 결정하고 유가 방어에 나선 것. 결과적으로 연말엔 배럴당 15달러에 이르며 ‘재결합’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하지만 OPEC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87년 감산에 대한 재합의에 실패한 것. 더욱이 오일 쇼크 이후 석유 소비량도 줄어 가격은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88년 배럴당 13달러까지 떨어지며 장기간의 저유가 시대로 진입했다.한 번 내려 선 가격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90년대 내내 15~20달러 사이에서 오르내림을 반복했다. 하지만 한두 차례의 위기는 있었다. 과거의 쇼크와 마찬가지로 전쟁 등 경제 외적인 요인이 빌미가 됐다.90년대 국제 유가의 변동은 이라크에서 시작해 이라크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를 중심으로 중동 지역의 정치 상황이 얽히고설키면서 가격 불안을 야기한 것이다. 최초의 위기는 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벌어졌다.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9월 한때 두바이유가 36달러까지 치달으며 3차 오일쇼크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번져나갔다. 하지만 91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유가는 안정을 찾아갔다. 생산이 조기에 재개될 것이라는 기대로 91년 말 15달러대까지 내려앉았다.90년대는 대체로 조용했다. 수급과 정치적 불안으로 등락이 있었지만 폭은 크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가장 큰 가격 변수는 아시아의 경제 위기였다. 경제 침체로 석유 소비량이 줄면서 유가는 급락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OPEC의 감산과 고유가를 주장하는 강경파의 득세로 오름세를 회복했다. 98년 10달러 초반으로 추락했던 것이 99년엔 17달러 수준으로 올라섰다.2000년대 초반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한 세력은 OPEC였다. 고유가를 내세운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결속력을 공고히 다진 OPEC은 공급량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면서 유가 안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OPEC은 2000년 ‘유가 밴드제’를 도입해 유가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2~28달러대로 정해진 목표 유가가 잘 지켜진 것이다.하지만 2001년 9·11 사태 당시엔 OPEC도 유가 하락을 막지 못했다. 세계 경제 침체 우려와 이에 따른 수요 감소로 11월 17달러까지 밀렸다. 그렇지만 OPEC과 비OPEC 산유국들이 감산에 합의하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2002년엔 24달러 고지를 다시 밟을 수 있었다.20달러 중반대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유가는 2004년 이후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고유가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이후 국제 유가는 매년 최고가를 갈아치우며 고공행진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이번 고유가 현상은 이전의 오일 쇼크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오일 쇼크는 전쟁이나 혁명 등 경제 외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 반면, 2000년대의 고유가는 수급의 불균형이라는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일단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세계 경제가 호황기에 들어서면서 석유 소비량이 늘어난 것. 특히 중국과 인도 등 브릭스 국가들을 위시한 신흥 경제대국의 산업화는 석유 소비량을 유례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004년 2분기 세계 석유 수요는 전년 동기 대비 하루 410만 배럴가량 증가했는데 이는 2003년 전체 증가량인 하루 150만 배럴의 세 배 가까운 수치다. 반면 공급량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석유 생산량은 줄이기는 쉬워도 늘리기는 어려운 비탄력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빠르게 불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게다가 오랫동안 저유가가 이어지면서 산유국들은 생산시설을 확대하지 않았다. 원유 생산시설은 물론이고 정제 시설도 부족하다. 이에 따라 휘발유 가격이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고 이는 국제 원유 가격의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하지만 OPEC은 여전히 고유가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생산량이 단기간에 크게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원유 공급량이 부족해지자 미국, 중국 등 각국이 아프리카, 카스피해, 카자흐스탄 등 비중동 지역의 원유를 확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점도 이번 고유가 현상에서 등장한 특징이다. 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