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달러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작금의 달러화 가치는 1970년대 초 세계 경제가 변동 환율 제도를 채택한 이후 최저치 수준에 근접할 정도다. 이처럼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 것이 직접적 원인이지만 그 이면에는 달러화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 이유들이 자리 잡고 있다.첫째, 달러화 위상 약화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6%에 달하는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고 있고 적자 비중도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이 정도의 경상수지 적자라면 다른 나라 같았으면 이미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통화 가치가 폭락했겠지만 기축통화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로 해외로 유출됐던 달러화가 미국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유입되는 ‘달러 리사이클링(dollar recycling)’ 구조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달러 리사이클링 구조가 깨질 경우 달러화 가치 폭락과 함께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 위상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그런데 최근에 달러 리사이클링 구조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8월 한 달 동안 해외 투자자들은 미국 유가증권을 1630억 달러어치나 팔아치웠다. 한 달 규모로는 사상 최대 수준이다. 미국으로 해외 자본이 유입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 밖으로 빠져나간 것이다.둘째, 오일머니와 아시아머니 규모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 달러화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경상수지 흑자가 크게 늘어나고 고유가를 바탕으로 산유국에 돈이 몰리면서 오일머니와 아시아머니의 투자 자산 축적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 2006년 말 현재 오일머니에 기초한 투자 자산과 아시아 중앙은행의 투자 자산은 각각 3조 달러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금들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오일머니는 전통적으로 유럽 지역 자산 운용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미국 자산, 특히 미국 국공채 투자에는 소극적이다. 아시아머니는 그동안 달러화 자산에 집중 운용돼 달러 리사이클링을 뒷받침해 주는 원동력 역할을 해 왔지만 이제 더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달러화 보유가 지나치게 늘어난데 부담을 느끼고 있는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외환 보유액 운용에서 달러화 자산 일변도를 벗어나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 방향으로 변화 중이기 때문이다.셋째, 유로화의 등장은 달러화의 위상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과거에는 달러화가 약점이 있더라도 이를 대체할 마땅한 통화가 없었기 때문에 달러화의 위상이 크게 위협받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유로화의 등장은 달러화에 위협적인 존재다. 유로화는 미국 달러화의 패권을 넘볼 수 있는 기축통화로서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유로 경제권은 미국 경제와 비슷한 경제 규모와 교역 규모를 가지고 있어 세계 결제통화로서의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 2006년 유로권의 GDP는 11조7000억 달러, 교역 규모는 3조8000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GDP 13조2000억 달러, 교역 규모 3조 달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상의 요인들을 감안할 때 앞으로 달러화의 기축통화 역할은 점차 축소되고 여타 통화의 역할이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유로화는 유럽 지역의 통합통화로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면서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일본 엔화나 중국 위안화는 달러화를 대체할 기축통화로서는 약점이 있지만 세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할 통화로서의 기능 확대는 가능하다. 엔화는 대규모 엔 캐리 트레이드를 통해 국제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등 세계 금융시장에서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위안화는 중국 금융시장이 낙후돼 있고 전반적인 경제 구조가 불안정해 국제통화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아직은 역부족이지만 경제 규모가 급격히 커지고 있어 장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바야흐로 달러화의 기축통화 독점 시대가 저물고 기축통화의 과점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금융팀장약력: 1961년 서울 출생. 1985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98년 KAIST 경영대 금융공학 박사. 1988년 삼성경제연구소 경제동향실 수석연구원. 2007년 거시경제실 금융팀장(현).seriksw@s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