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에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최근 기자에게 “요즘 국회나 국무회의보다 ‘1동’을 뚫는 게 더 어렵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이는 공정위가 추진하는 정책이 번번이 과천 정부 청사 1동에 입주해 있는 재정경제부와 법무부의 반대에 가로막혀 좌절을 겪고 있기에 하는 소리다. 과천 청사는 모두 5동의 정부부처 건물과 안내동 후생동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재경부는 과거 경제기획원 시절부터 1동을 썼고 공정위는 경제기획원에서 독립하며 5동으로 갔다.‘1동’에 가로 막힌 정책으로는 우선 대기업들의 순환 출자 구조 해소에 대해 세제 혜택을 주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세제 혜택의 골자는 순환 출자 해소 목적으로 주식을 팔거나 맞교환한 기업에 양도 차익에 따른 과세를 일부 줄이거나 미뤄주는 것이었다. 이는 지난해 11월 정부 부처 간 합의에 따라 추진하기로 한 정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재경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사실상 무산 위기에 놓였다.이 방안은 재경부가 마련한 내년도 세제 개편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어 국무회의를 통과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정기 국회를 통한 법 개정은 무산됐다고 봐야 한다.세제 개편안 발표 직후 공정위는 “재경부 담당 과장이 온 지 얼마 안 돼 업무 파악이 덜 돼서 일 것”이라며 부처 협의를 통해 재추진을 약속했다. 그러나 재경부는 여전히 당분간 재검토는 없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로서는 기업들에 얼굴을 들 수 없게 됐다.동의명령제를 둘러싼 법무부와의 ‘기싸움’에서도 공정위가 판정패했다. 대립은 공정위가 입법 예고한 동의명령제 법안을 법무부가 반대하면서 시작됐다. 법무부는 동의명령제를 추진하려면 공정위가 갖고 있는 ‘전속고발권’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들어왔다. 최근에는 건설사 담합을 솜방망이 처벌하고 사건을 덮었다며 검찰이 이를 다시 파헤치면서 공정위에 대해 사상 초유의 압수수색까지 했다.이 같은 ‘서슬’에 밀린 공정위는 이달 초 동의명령제 사건 내용을 검찰에 사전에 통보하고 ‘검찰총장 의견 청취’를 명문으로 보장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재계에선 동의명령제 도입 취지가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경제 검찰’을 자임해 온 공정위가 압수수색까지 동원한 검찰 으름장에 밀려 동의명령제를 대폭 후퇴시켜 실망스럽다는 반응이다.이래저래 정부 부처 사이의 ‘끗발’에선 한참 뒤처져 있음이 확인되자 공정위가 입주한 과천청사 5동엔 자괴감마저 감돌았다. 주위에서 “그동안 힘없는 기업들에만 서릿발 같았다”는 수군거림이 들리는 듯하다며 한 간부는 “너무 속상해 추석 연휴 동안 매일 저녁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이번 수정안 제시는 사실상 공정위가 검찰에 무릎을 꿇었다는 평가다. 공정위는 공식적으로 “검찰의 의견에 공정위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검찰이 동의명령 불가 의견을 낼 경우 이에 반하는동의명령을 내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동의명령제는 기업과 공정위의 합의에 의해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가 있는 사건을 제재 없이 종결하는 제도다. 공정위는 지난 8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합의 사항인 동의명령제의 신청 절차와 적용 대상 등을 규정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마련해 입법 예고했다.하지만 앞으로 기업들의 동의명령 신청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터져 나온다. 동의명령 신청으로 관련 혐의 사실이 검찰에 통보된다면 자진해서 치부를 드러내고 소비자 피해 회복에 나설 기업이 몇이나 있겠느냐는 얘기다.일각에서는 공정위가 이처럼 정부 부처 내에서조차 수세에 몰린 것은 그동안 과도한 기업 규제에 앞장서면서 시민 사회에 ‘우군’을 잃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내놓고 있다. 재경부에 치이고 법무부에 눌려도 누구 하나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이번에는 기업들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신뢰’를 잃었다는 증거다. 차기현·한국경제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