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도 범상치 않은 인상이다. 덩치가 크지는 않지만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라고 직원들이 입을 모으는 이유를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서번트 리더보다는 카리스마형 리더라고 말한다. 도전하는 기업엔 결단력 있는 강한 리더가 적임이라는 설명이었다. 6년 만에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10개의 기업을 거느린 중견 그룹의 총수가 된 이상직 케이아이씨 부회장과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2020년까지 매출 10조 원, 순이익 1조 원을 달성할 계획입니다.”현재 케이아이씨 그룹의 총 매출은 약 2000억 원. 불과 몇 년 만에 이만한 기업군을 일군 것도 대단한데 이 부회장의 포부는 기자의 짐작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너무 큰 목표 아니냐는 반문에 “당겨지면 당겨졌지 늦춰지진 않을 것”이라는 호기 넘치는 답변이 돌아왔다.“얼마 전에 <텐배거>라는 책을 냈습니다. 누구나 어떤 조직이나 10배 성장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동안 직원들에게 이 비전의 실현 가능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왔고요.”몇 번의 ‘10배 성장’을 거듭했다는 이 부회장의 스토리는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안의 도움 없이 학업을 이어가는 고단한 시간이었다. 나전칠기 사업으로 부를 일군 부친의 사업은 나전칠기가 시대의 뒤편으로 밀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가업을 이어받은 큰형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집안의 몰락은 성공에 대한 결의를 다지게 했다.졸업과 동시에 현대증권에 입사했다. 무려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증권 업계의 신입사원들이 일류대 출신들로 채워지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 부회장의 합격은 이변에 가까웠다.“현대그룹이어서 붙었을 겁니다. 학벌보다는 열정과 의지, 뚝심이 있어 보이면 뽑아주는 문화였거든요. 입사 전부터 그 문화가 좋았고 그래서 현대에 지원했죠. 케이아이씨에도 열정과 의지라는 문화를 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증권맨으로서 이 부회장의 성과는 독보적이었다. 스스로 ‘감이 무척 좋다’는 이 부회장은 자본시장의 흐름을 귀신같이 잡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데일리 시황을 쓰면서 추천한 종목은 대부분 상승 흐름을 탔다.그의 남다른 ‘감’은 지점 영업을 하면서 빛을 발했다. 발령이 난 신설 지점의 영업실적을 불과 6개월 만에 1위에 올려놓았다. 그 후 각 지점에서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몇 곳의 지점 실적을 최상위로 끌어올렸다. 사내에서 실시한 펀드매니저 시험에선 1등으로 합격했다. 증권맨들에게 허용된 근로자주식저축 계좌를 통해 2년 만에 1540%의 수익률을 달성하는 실전 투자 능력도 보여줬다. 첫 번째 텐배거였다.증권맨으로서 그의 성공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돌연 사표를 던졌다. 그리곤 그동안 개인적으로 투자해 거둔 수익과 펀딩을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하드페이싱 전문 기업인 케이아이씨를 인수했다. 2001년의 일이었다.“프리코스닥(pre-kosdaq) 기업 20여 곳에 투자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도산했습니다. 이유는 경영자들에게 있었어요. 최고경영자(CEO)로서 적절하지 않은 사람들이 사장 자리에 앉아 있더군요. 그런 사람들에게 투자해 수익을 기다리느니 직접 CEO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죠. 어렵지 않다고 여겼어요. 펀드매니저가 기대하는 CEO의 역할을 직접 해내면 되는 거잖아요.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답이 나온 상태였죠.”당시 케이아이씨는 ‘망가져가는 기업’이었다. 원인은 경영 능력의 부재였다. CEO는 병상에 누워 있어 기업을 지휘할 힘이 없었고 후계자는 능력이 부족했다. 선장을 잃은 본부장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해법은 분명했다. CEO가 제대로 역할을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터였다.무엇보다 흩어진 조직력을 재구축하고 직원들의 충성도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30대의 젊고 낯선 CEO의 등장에 직원들은 의외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일터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이 부회장에게 기대를 건 것이다. 보상 체계를 강화하고 다양한 계기를 통해 소속감을 고취했다.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끝까지 지켰다. 현재 케이아이씨의 시가총액은 인수 당시보다 10배 이상이 됐다. 두 번째 텐배거를 완성한 셈이다.케이아이씨를 인수한 이듬해인 2002년 이 부회장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 감속기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삼양감속기가 매물로 나온 것이다. 이 회사의 사정도 케이아이씨와 유사했다. 창업주가 암과 투병 중이었고 아들은 어렸다. 시장 독보적인 기업이었던 만큼 탐을 내는 곳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 이 부회장이 새로운 주인이 됐다. 마침 케이아이씨가 턴어라운드하는 시점이었던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케이아이씨와 삼양감속기의 인수는 모두 큰 파문 없이 정상화에 이르렀다. 점령군이 이렇게 평화롭게 정착한 경우는 흔치 않다. 더욱이 삼양감속기는 인수 2개월 후에 노조가 결성되기도 했다.“왜 저항이 없었겠습니까. 그때마다 정공법을 선택했죠. 무엇보다 신상필벌을 명확히 했습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리더는 3번의 참을 인(忍)자를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참고(인내), 두 번째는 더 설득하고(용인) 그래도 안 되면 죽이라(잔인)고 말입니다. CEO는 우유부단하면 안 됩니다. 원칙을 지키고 명확한 의사결정을 내려줘야 합니다.”이 부회장은 케이아이씨와 삼양감속기 인수 후에도 계속해서 인수 작업을 추진했다. 최근에도 현대성형기를 인수해 관심을 모았다. 인수 대상 기업의 자격은 하나였다. 인수 후 경영을 잘하면 틈새시장에서 1위를 할 수 있는 기업들이면 됐다. 이는 ‘글로벌 니치 리더’ 그룹이 되겠다는 그의 포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케이아이씨, 삼양감속기, 이스타투자자문, 동명통산 등 케이아이씨그룹의 자회사들은 해당 분야에서 업계 선두에 서 있다.이 부회장은 앞으로도 될 만한 기업을 인수해 나갈 계획이다. 1위를 할 수 있는 기업이라면 적극 나서겠다는 것. 이는 케이아이씨그룹의 성장 동력이라고도 말했다. 그룹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인수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주력 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 경우 이를 상쇄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업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흥미로운 사실은 이 부회장에게 자신의 기업을 인수해 달라고 요청해 오는 기업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3~4개사가 대기 중이다. 케이아이씨와 삼양감속기 등 이 부회장이 인수한 기업들이 성장 궤도에 올라서는 것을 보고 이 부회장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 마케팅을 책임질 테니 합작을 하자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투자를 제의하는 곳도 있다.“제조업 계열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금융 계열사들의 해외 진출에도 청신호가 켜진 상태입니다. 일단 해당 지역에 진출한 제조 계열사의 기업 금융을 맡는 식으로 진출할 수 있겠죠. 제조와 금융의 동반 성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이 부회장은 자신의 삶에 100% 만족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지와 계획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 부회장의 궁극적인 꿈은 의외로 세계적인 기업의 총수가 아니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텐배거를 이룰 수 있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나 10배 성장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약력: 1963년생. 81년 전주고 졸업. 89년 동국대 경영학과 졸업. 2005년 고려대 경영학 석사. 89년 현대증권 입사. 2001년 케이아이씨 사장. 2002년 삼양감속기 인수. 2006년 동명통산 인수. 2006년 케이아이씨그룹 총괄부회장(현).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