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진 매각·제휴바람… 자존심 ‘추락’

세계 자동차 업계가 재편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미 3위의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는 사모 펀드인 ‘서버러스 캐피털’로 넘어갔다. 2위의 자동차 회사인 포드의 대주주인 포드 가문도 지분 매각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버러스도 결국 자동차회사에 크라이슬러를 재매각할 것으로 예상돼 세계 자동차 업계의 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현대자동차와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이다. 포드나 크라이슬러를 인수할 경우 미국 시장 점유율을 단기간 내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요타와 혼다 등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독자 진출을 강화한다는 방침이어서 GM으로 대표되는 미국 회사와 일본, 한국 중국의 자동차 메이커 간 미국 시장 쟁탈전은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사모 펀드로 넘어간 크라이슬러벤츠를 생산하는 다임러크라이슬러는 지난 14일 크라이슬러를 사모 펀드인 서버러스 캐피털에 매각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지분 80.1%를 74억 달러에 매각한다는 게 발표의 핵심이다. 나머지 지분 19.9%는 다임러가 계속 보유하기로 했다.지난 1998년 당시 다임러벤츠는 크라이슬러를 인수함으로써 GM과 함께 세계 시장을 양분하겠다는 야심 찬 첫발을 내디뎠다. 언론들은 이를 ‘세기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아니올씨다’였다. 고급차 위주의 다임러벤츠와 미니밴과 트럭 중심의 크라이슬러의 결합은 이상적으로 보였으나 계속해서 엇박자를 냈다. 크라이슬러의 경영이 악화되면서 그룹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돈 잡아 먹는 하마’로 골칫덩어리가 됐기 때문이다.다임러는 결국 크라이슬러를 매각하기로 결정했고 ‘세기의 결혼’은 9년 만에 ‘세기의 파경’으로 매듭지어졌다. 지난 1998년 다임러가 크라이슬러를 인수하고 지불한 금액은 360억 달러. 그러나 서버러스에 매각한 금액은 74억 달러에 불과했다. 비록 종업원에 대한 연금과 복지혜택 부담금 180억 달러를 서버러스가 인수한다는 조건이 붙었다고는 하지만 크라이슬러의 가치가 그만큼 폭락했다는 방증이다. 실제 크라이슬러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1999년 16%에서 작년엔 12.6% 추락, 도요타에 3위 자리마저 내주고 말았다.크라이슬러를 인수한 서버러스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할 전망이다. 직원 감축과 공장 폐쇄 및 이전, 연금 및 복지 혜택 축소 등이 그것이다. 전문가들은 크라이슬러가 연초 발표한 1만3000명 해고보다 더 강도 높은 구조조정안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필요할 경우 공장이나 설비도 과감히 인건비 부담이 덜한 아시아지역 등으로 옮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경쟁사인 GM이나 포드도 영향을 받게 돼 ‘제2의 구조조정 바람’이 미 자동차 업계를 강타할 것으로 보인다.서버러스가 크라이슬러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른 자동차 회사로부터 출자를 받거나 제휴를 맺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강력한 후보는 한국의 현대차와 중국의 자동차 회사다. 현대차와 중국의 제일자동차 등은 이미 크라이슬러 인수에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 만큼 크라이슬러의 단기적 경쟁력 강화를 꾀할 수밖에 없는 서버러스가 출자나 제휴를 제안할 경우 성사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더욱이 서버러스는 파산 직전의 회사를 인수해 이익이 나는 회사로 탈바꿈시킨 뒤 되파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모 펀드다. 크라이슬러가 일정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하면 재매각에 나설게 분명하다. 대상은 자동차 회사일 수밖에 없다. 미국 시장 점유율을 단기간에 높일 수 있는 크라이슬러를 최종적으로 인수하기 위해서라도 제휴나 출자는 필요하다. 크라이슬러를 누가 인수하느냐와 중간에 누가 제휴하느냐는 세계 자동차 판도를 바꿀 변수가 될 수 있다.지분매각을 검토한 포드포드는 지난 1903년 설립됐다. 그후 104년 동안 포드 가문이 대주주로 존재하고 있다. 포드 가문의 보유 주식 수는 7100만 주로 전체의 4%에 불과하다. 그러나 의결권이 주당 다른 주식보다 16배나 많아 전체 의결권은 40%에 달한다.이런 포드 가문이 지난 4월 21일 모여 지분 매각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는 투자은행인 와인버그 파트너스도 참석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지분 매각이나 대안 모색을 위해 와인버그 파트너스를 자문사로 선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게 현지 언론의 보도다. 포드 가문은 이에 대해 변호사를 통해 “지분 매각을 논의한 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그러나 업계는 포드 가문의 지분 매각 가능성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보고 있다. 포드의 주가가 지난 1999년 이후 74%나 하락한 상태에서 과연 계속 보유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회의론이 젊은층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비록 선조의 창업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론을 앞세운 집안 어른들의 목소리에 눌렸지만 포드의 경영 사정이 계속 악화될 경우 지분 매각은 언제든지 꺼내들 수 있는 카드라는 분석이다. 실제 포드는 작년 127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적자를 냈다.만일 포드 가문이 지분 매각에 나설 경우 이를 누가 인수하느냐는 세계 자동차 시장 재편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 자동차 업계 판도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크라이슬러가 결국 사모 펀드인 서버러스에 넘어감에 따라 사모 펀드의 무서운 식탐(食貪)이 언제 어디까지 계속될지가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들어 사모 펀드는 무서운 기세로 세계의 기업들을 인수하고 있다. 계속해서 천문학적인 딜을 성사시키고 있을 정도다. 이런 추세라면 결국 사모 펀드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고 말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크라이슬러를 인수한 서버러스는 미 사모 펀드 순위 8위로 분석된다. 1992년 설립된 서버러스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고 그런 사모 펀드에 불과했다. 작년 제너럴모터스(GM)의 금융자회사인 GMAC의 지분 51%를 80억 달러에 인수함으로써 사모 펀드계의 ‘무서운 아이’로 등장했다. 지금은 자동차 항공 군수 금융 건강 부동산 통신 등 다양한 업종에 걸쳐 38개 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이들 투자회사의 작년 매출액은 600억 달러에 달한다. 우리식으로 하면 ‘문어발식 재벌’인 셈이다.서버러스보다 큰 블랙스톤 KKR 칼라일 등의 투자 규모는 더하다. 칼라일의 경우 48개의 투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 사모 펀드는 특히 명망가들을 간판 스타로 내세우고 있다. 서버러스만 해도 부시 행정부에서 2대 재무장관을 지낸 존 스노가 회장을, 아버지 부시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낸 댄 퀘일이 국제부문 회장직을 맡고 있다. 또 블랙스톤의 경우 폴 오닐 전 재무장관을 자문역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칼라일은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을 자문위원으로 모시고 있다.전문가들은 사모 펀드의 위력이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풍부한 글로벌 유동성이 끝없이 사모 펀드로 몰려들고 있어서다. 이들은 특히 화려한 인맥을 바탕으로 정치권과도 끈끈한 관계를 구축해 거칠 것 없는 행보가 계속될 것이란 분석이 많다. 그러나 이들이 성장할수록 경계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사모 펀드는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상당액을 차입한다. 만일 한 곳에서 유동성에 문제가 생겨 차입금 상환이 지체될 경우 파장은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신용경색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뉴욕연방은행은 이런 이유로 현재 금융시장에서 가장 큰 불안 요인은 사모 펀드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사모 펀드 전성시대지만 사뭇 불안한 전성시대다.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