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해외 오가며 대북 사업 ‘기반 다지기’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의 길고 긴 동면이 끝나고 신록의 봄이 도래할까. 최근 김 전 부회장이 활발한 대북 행보를 예고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5월 2일부터 8일까지의 출국을 비롯해 최근 해외로 자주 발걸음을 하고 있다. 주로 중동이나 중국 등 최근 비즈니스가 급성장하고 있는 국가를 다니는 것으로 전해진다.지난해 김 전 부회장은 ‘아천글로벌코퍼레이션(이하 아천글로벌)’을 설립해 일종의 대북 사업 전초기지로 삼고 있다. 등록된 사업 목적에는 건설업, 무역, 여행, 관광 개발, 골프장, 여객, 물류, 공원묘지, 석유·가스 판매, 부동산 개발, 광고 대행 등이 총망라돼 있다. 제조업만 없다 뿐이지 서비스 업종은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다.김 전 부회장이 해외로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아천글로벌이 북한 인력의 해외 송출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중동이나 중국이 급성장하고 있어 인력의 수요가 많기 때문에 인력 송출에는 적합하다는 분석이다. 사명에서도 대북 사업에 국한하지 않고 ‘글로벌’ 사업을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아천글로벌은 지난해 8월 설립됐다. 김 전 부회장은 이 회사에 아무런 적을 두고 있지 않은 상태지만 실질적으로 김 전 부회장의 회사로 알려진다. 현대아산 시절 김 전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육재희 전 현대아산 상무(44)가 이 회사의 대표이사다. 김 전 부회장이 2005년 여름 현대그룹 내부에서 갈등을 빚을 때 두 사람은 동반 퇴임한 바 있다. 김 전 부회장의 아들인 김진오 씨(36)도 등기이사로 올라 있다.이들은 아직까지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서울 남부터미널역 인근에 있는 아천글로벌의 사무실은 별다른 간판이 없는 일반 오피스텔이었다. 직접 찾아가 본 사무실에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 아천글로벌과는 상관이 없고 다만 사무실을 빌려 쓰고 있다는 얘기만 들려줄 뿐이었다. 이들은 육 대표가 이곳이 아닌 다른 사무실에 상주하고 있다고 알려 줬다. 육 대표는 대북 사업 현황을 묻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직은 말할 것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김 전 부회장에 대한 근황을 묻는 질문에도 “내가 말할 사안은 아니다”며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아천글로벌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사업은 눈에 띄지 않지만 사전 준비 작업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김 전 부회장은 3월 북한을 방문해 아천글로벌의 평양 및 개성 사무소 개설에 잠정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무소는 아천글로벌이 추진하는 대북 사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단계에 설치될 예정이다.아들 김진오 씨도 활발하게 움직여최근에는 김 전 부회장의 아들인 김진오 씨도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충남 금산군에 있는 PVC창틀 제조업체인 샤인시스템은 5월 23일 주주총회를 통해 김 씨를 새로운 등기임원으로 선출할 예정이다. 또 김 씨는 이 회사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25억 원을 출자해 지분 5.12%(160만 주)를 획득할 예정이다. 그는 2000년 창업한 의료기기 업체인 미래마인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손을 뗐고 회사도 해산했다.샤인시스템은 새로운 임원 선임, 증자에 이어 사업 목적에 수산물 도소매업을 추가했다. 대북 사업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대북 사업이 단지 관광과 공단 개발이 아니라 직접적인 교역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샤인시스템 측은 “주총 전까지는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다. 그분이 임원이 되면 그때 뭔가 한마디 하지 않겠느냐”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최근의 정황들로 미루어 보면 김 전 부회장은 측근들과 함께 전방위적인 대북 사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은 단순히 북한의 자연과 토지, 노동력을 이용하고 임대료·임금을 주는 것이었지만, 인력을 송출하거나 수산물을 수출하는 것은 북한의 주도 하에 산업이 움직이는 것이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문호를 개방한다면 대북 네트워크를 확고히 다져 놓은 아천글로벌이 모든 산업에서 선점 효과를 누릴지도 모를 일이다.대북 사업이라는 ‘밝은 미래’를 착착 준비하는 와중에도 김 전 부회장은 현대건설 분식회계라는 ‘어두운 과거’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 2005년 8월 현대그룹 내부감사에서 개인 비리가 적발됐다는 이유로 대표이사직을 박탈당하고 그룹을 떠났다. 이듬해 2월에는 대검 공적자금 합동단속반의 수사로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 대출 혐의로 기소됐다.김 전 부회장이 현대건설 대표로 재직하던 1998년 김재수 당시 부사장과 1조 원대 분식회계를 이용해 9회에 걸쳐 2228억 원을 대출받고 7회에 걸쳐 회사채를 9375억 원어치 발행했으며, 2000년 2월 전표를 조작해 마련한 회사자금 3억 원을 자민련 후원금으로 줬다는 혐의였다. 당시 검찰은 분식회계에 대해 “현대건설 분식회계는 고 정몽헌 회장의 결정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2943억 원의 대출금 중 1745억 원, 1조9483억 원의 회사채 중 8230억 원이 상환됐고 개인 유용한 것이 없는 점을 감안해 이들을 불구속기소했다”고 했고 김 전 부회장도 “현대건설 분식회계는 내가 부임하기 전부터 진행돼 있었던 것”이라며 관여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자민련에 대한 후원금 부분은 인정했다.분식회계 혐의 못 벗으면 ‘가시밭길’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 전 부회장 등 기소된 3인에게 징역 2년 6개월이라는 실형을 선고했다. 분식회계 금액이 거액이고 이로 인해 국민의 혈세인 공적자금이 투입됐으므로 엄한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다만 도주의 우려가 없고 확정 판결 때까지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처음 기소 단계에서도 검찰은 분식회계가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지시로 이루어졌고, 개인 착복이 없었다는 점에서 불구속 수사가 진행됐고, 1심 선고 이후에도 도주의 우려가 없고 확정 판결 때까지 방어권을 보장하겠다는 의미로 법정구속하지는 않았었다.이후 최근까지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김 전 부회장에게는 향후 대북 사업의 발목을 잡게 될지도 모를 이 재판을 무사히 끝내야 할 처지다. 대법원 최종심에서 형이 확정되면 그때부터는 실형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분식회계 재판은 대북 사업에서 상당히 중요한 변수다.김 전 부회장은 대북 사업뿐만 아니라 민주평화통일위원회 자문위원 활동도 최근에 열심이다.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조직들 중 서울지역 담당 부의장을 도와 5월 3일 서울평화통일포럼을 개최하는 데 앞장섰다. 민주평통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 김 전 부회장의 표정이나 기분이 밝고 여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건강도 좋아 보이고 활력 있는 모습이어서 새로 시작한 사업이 잘 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 전 부회장이 자문위원을 맡은 것은 2005년 7월 2일부터다. 그 뒤 한 달 만에 현대그룹 대표이사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지만 자문위원 직책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2년 임기가 끝나는 올해 7월 연임할 것인지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올해 김 전 부회장의 사업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면 대북 사업의 주도권을 가진 현대그룹과의 갈등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허가권을 쥐고 있는 통일부는 현대그룹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분위기지만, 북측이 지난해 롯데관광에 개성 관광을 요청하는 팩스를 보내면서 양자간의 경쟁 구도를 유도하는 것을 보면 현대그룹이 안심할 수만은 없는 분위기다.게다가 2005년 김 전 부회장이 현대그룹을 떠나야 했을 때 북측이 보여준 집착을 보면 아직도 김 전 부회장의 대북 네트워크와 영향력이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대북 사업이 결국은 인적 네트워크와 금력에 의해 결정되는데, 현대그룹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김 전 부회장이 대외 활동을 강화한다면 북측도 이를 이용해 양측 사이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이간질을 할 우려도 있다.6월부터 내금강 관광을 시작하는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은 5월 27일 내금강 시범 관광에 나서면서 대북 사업의 분위기를 다잡을 예정이다. 바야흐로 대북 사업은 꽃피는 춘삼월을 지나고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