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책 읽으며 가정행복 일궜지요’

매주 금요일 아침 5시 30분 형제자매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난 뒤 학교에 가고 출근하는 집안이 있다. 6남매와 그들의 자녀를 모두 합하면 무려 26명에 이른다. 모든 가족들이 한꺼번에 다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형제와 조카들이 매일 모이기도 힘든데 책까지 읽는다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2004년 1월부터 가족독서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이는 한국재무설계(주)의 오종윤 대표다. 오 대표는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신한은행에서 9년, 푸르덴셜생명에서 5년 간 일한 뒤 현재는 한국재무설계㈜ 대표를 맡고 있다. 가족 독서운동을 제안한 배경에는 본인이 노후 설계, 인생 설계를 하면서 늘 해 왔던 고민이 담겨 있다.“지금 세대는 앞으로 100세까지는 살 겁니다. 그런데 현업에서는 50~60세에 은퇴한단 말이죠. 그렇다면 나머지 40~50년을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전문성을 키우면 노후에 먹고 살 밑천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이들 가족은 매주 금요일 새벽 5시 30분에 모여 8시 30분까지 책을 읽는다. 저녁에는 각자 일정이 있어 바쁘고 모이기 힘들지만 아침에는 가능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 시간을 택한 것이다. 독서 지도 교사를 초빙해 독서 후 토론과 독후감 작성에 대해 지도를 받기도 했다.그렇지만 처음부터 형, 누나, 동생들이 이를 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6남매의 맏형인 오종석 씨(48)는 “친목 모임도 아니고 독서 모임이라니, 책을 읽어본 것이 언제인지 부담이 되기도 하고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우리들보다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서로 독려했고, 자신이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부모 스스로 책을 읽는 데 동참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지금은 오 씨가 가장 열성적인 독서 모임 예찬론자가 됐다. 3년 간 해온 가족 독서운동의 경험을 살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직접 독서 모임을 꾸리고 독서 지도 교사 활동을 하고 있다. 오 대표 위로는 세 명의 형과 누나 한 명,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 형들은 일산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쉽게 동참할 수 있었는데 누나는 안산, 여동생은 분당에 살고 있어 처음에는 참여하지 못했다.6남매와 자녀들 꼬박꼬박 참석그러나 가족들 사이에서 독서운동의 열기가 퍼지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자녀들을 데리고 참석하기 시작했다.가족 독서운동의 효과는 어땠을까. 오 대표는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고 얘기한다. 우선 가정 내에서 대화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면 “아, 같은 책을 읽었는데도 저 사람은 나와 저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 대화가 늘어나고 서로의 입장 차이를 받아들이면서 부부간의 갈등이 확 줄었다.자녀 교육의 효과는 어떨까. 단순히 책을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읽은 책마다 독후감을 쓰도록 했다. 독서 모임을 한 지 벌써 3년이 넘다 보니 오 대표의 아들이 읽은 책은 이미 1000권이 넘었고 그만큼 글 쓰는 훈련도 많이 한 셈이다.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아들의 글은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쓴 글이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준급의 솜씨다. “이미 어른인 저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고 책을 읽는 속도도 훨씬 빠릅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내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게 됐다.맏형 오 씨의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인데도 첫째 아들과 함께 대학교 1학년이다.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통과하고 지금 뉴질랜드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오 대표의 아들도 학교 성적이 뛰어나고 반장을 할 정도로 사교성도 풍부하다. 흔히 TV를 보지 않고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게임은 일요일에 한두 시간 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TV나 게임 같은 자극적인 매체에 몰두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아이들의 성격도 침착해지고 나이에 비해 성숙해졌다.‘부모가 솔선수범해야 가능’또 과외나 학원도 거의 수강하지 않는다. 스스로 익히고 깨닫는 공부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히 과외비나 학원비가 들지 않아 인생 설계를 위한 투자도 그만큼 늘어날 수 있다. 이는 재무 설계사인 오 대표의 직업적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하다 보니 정작 자신들을 위한 노후 투자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해결할 방안을 제시한 셈이다.그렇지만 무작정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학교 성적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독서가 만능 해결사라고 믿고 학교 교과에 대한 학습 지도를 소홀히 하면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맏형 오 씨는 “2~3년씩 독서를 해 아이들이 똑똑해져 학교 시험도 잘 볼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독서 지도를 통한 효과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며 “처음엔 학교 성적이 눈에 띄게 오르지 않지만 보이지 않게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스킬을 길러주게 돼 한 번 탄력을 받기 시작하면 능력이 빨리 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오 대표의 가족이 이렇게 독서 모임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10년 넘게 지속돼 온 이들 남매의 끈끈한 우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도 짝수 달 토요일에는 모든 가족이 모여 1박 2일로 가족 모임을 가지고 있다. 이들 남매의 우정은 그렇다 하더라도 형수들과 매부들은 싫어하지 않았을까. 오 대표는 “물론 어려움이 있었을 테지만, 나쁜 짓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고 하니까 다들 싫어하는 내색 없이 잘 따르고 있다”고 강조했다.아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편차는 있지만 대부분 잘 따라오고 있다. 목표량의 90% 이상을 소화하면 연말에 상금 100만 원을 인센티브로 주고 있다.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상관없이 똑같이 준다. 너무 많은 금액일까 싶지만 오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학원, 과외비로 들어가는 비용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고, 외부로 지출되는 돈도 아니기 때문에 아깝지 않습니다. 이 돈으로 아이들 여행을 보내든지 금융 상품에 투자하도록 하고 있습니다.”그렇지만 상금보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서 아이들이 먼저 책을 찾고 있다. “책을 읽으면 왠지 뿌듯하고 고상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오 대표의 가족은 독서 예찬론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