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판단·공격적 실행…‘결단의 CEO’ 명성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재계에서 가장 성공한 2세 경영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1981년 29세의 나이로 그룹 총수에 오른 후 그룹의 규모를 수십 배나 키워냈다. 경험이 부족할 것이라는 주위의 우려를 실력으로 일축해 버린 셈이다. 현재 김 회장은 나이로는 ‘젊은 총수’지만 경력으로는 ‘최고참’에 속한다. 힘과 연륜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돈 버는 계열사를 팔아라’김 회장은 인수·합병(M&A)의 귀재다. 고비마다 과감한 베팅으로 한화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결단의 CEO’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결단력은 특히 현재 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자리 잡은 기업들을 M&A할 때 빛을 발했다.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과 2002년 대한생명 인수가 대표적이다. 두 경우 모두 회사 안팎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결행, 그룹의 획기적인 성장 모멘텀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한양화학은 한국종합화학과 미국의 다우케미컬이 50 대 50으로 합작 투자한 회사다. 한때 고성장 가도를 달렸지만 2차 오일쇼크로 실적이 크게 악화돼 매각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 회장은 한양화학의 인수를 결정한다. 하지만 경영진이 팔을 걷고 만류했다. 기울어가는 기업을 인수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김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석유화학 업계의 업황이 좋아 성장 잠재력이 높다’며 경영진을 설득했다.김 회장의 판단은 적중했다. 한화석유화학은 빠르게 성장하며 한화그룹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한화는 경인에너지(현 SK인천정유)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정아그룹(현 한화리조트) 등을 연이어 인수하며 그룹의 사업 다각화를 본격화했다. 한화석유화학에서 벌어들인 돈이 든든한 ‘실탄’이 됐음은 물론이다.2002년 대한생명 인수도 김 회장의 결단으로 이뤄졌다. 김 회장이 자력으로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부실 기업을 인수하려 하자 이번에도 반대 여론이 빗발쳤다. 매각 대금이 엄청난 데다 회생 가능성이 불투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오히려 인수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늦어지면 대한생명의 최대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다 빠져나가고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을 것이라는 이유였다.결과적으로 이번에도 김 회장이 옳았다. 대한생명은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간의 부실을 털어내고 국내 2위의 생명보험사로 자리매김했다. 이익 측면에서도 그룹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005년 기준으로 1조3366억원인 그룹 이익의 40%에 해당하는 금융 계열사의 순이익 상당 부분이 대한생명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김 회장의 결단력은 계열사 매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김 회장은 신속하게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며 그룹의 안정화를 이뤄냈다. 베어링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던 한화기계 허브아이 베어링부문, 경인에너지, 한화바스프우레탄 등을 매각하고 빙그레와 경향신문을 계열분리,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며 외환위기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매각 기업 대부분이 그룹의 수익에 기여하는 알짜 기업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수익이 나지 않는 회사를 누가 사겠느냐”는 것으로 반대 여론을 일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결정의 방향이 옳다고 그 결과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결정이 내려진 다음의 후속 작업이다. 사실 김 회장의 경영자적 능력은 이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구조조정 당시 김 회장은 직접 담당팀을 진두지휘하며 조직의 화합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생명을 인수한 후엔 대한생명 회장자리를 맡아 회생의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김 회장이 야전사령관을 자처한 것은 대한생명이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력인 석유화학 사업은 업종의 특성상 실적이 들쭉날쭉 하는데, 이에 따라 그룹의 실적도 널뛰기를 하던 한화에게 금융 사업은 안정과 새로운 성장을 동시에 약속하는 ‘황금 열쇠’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기대는 불과 3년 만에 현실화됐다. 김 회장에게 ‘구조조정의 마법사’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손해보더라도 고용승계가 우선’김 회장은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최고경영자(CEO)로도 유명하다. 내부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공을 들이지만 외부 인재 영입에도 개방적이다. 지난해 창립 기념식에서 “인재는 곧 그룹의 미래 자산인 만큼 각 사의 성장 동력이 될 핵심 인재들이라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데려오고 데려온 뒤엔 반드시 한화 사람으로 만들라”며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사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줘도 좋다”고 강조했을 정도로 사람 욕심이 많다.김 회장의 인재관은 ‘전문가’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이론보다는 현장에서 갈고 닦은 경륜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총수에 취임하면 임원 인사를 단행, 측근들을 전진 배치하는 일반적인 관행과 달리 김 회장은 1981년 총수 취임 당시에도 선대 회장의 경영진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누구보다 한화와 해당 업종의 최고 전문가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외부의 전문가를 영입하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내부에 적임자가 없다면 외부에서 수혈하는 인재의 ‘하이브리드’를 내세운다. 신은철 대한생명 부회장은 삼성생명에서, 진수형 한화증권 사장은 산은자산운용에서, 권처신 한화손해보험 사장은 삼성애니카랜드에서, 김현중 한화건설 사장은 대우건설에서, 김광욱 프라자호텔 사장은 신라호텔에서 끌어들인 CEO들이다. 금융 건설 레저 등 분야에서 한화의 계열사들이 단기간에 업계 대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김 회장의 인재 경영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외부 인재 영입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김 회장이지만 그렇다고 내부 직원들에게 혹독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직원들을 끝까지 감싸 ‘의리파 총수’로 불릴 정도로 따뜻한 CEO다. 한화에너지를 매각할 때 “20억~30억 원 정도 손해를 봐도 좋으니 고용 승계에 신경을 써 달라”고 인수 기업인 현대정유 측에 부탁한 것이 대표적인 일화다. 매각 후엔 이미 남의 식구가 된 직원들에게 위기 극복 격려금을 지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베어링 부문을 매각할 때에도 고용 승계를 협상의 최우선 조건으로 제시해 해당 부문 인력 전원을 승계시키기도 했다. 김 회장의 ‘의리 경영’은 협조적인 노사관계 정착으로 이어져 성공적인 구조조정의 발판이 됐다고 한화 측은 풀이하고 있다.김 회장은 ‘연구하는 CEO’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평소 독서량이 엄청나다는 것. 김 회장이 주위의 우려를 무릅쓰고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도 폭넓은 독서를 통한 안목과 치밀한 조사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는 게 회사 안팎의 평가다.김 회장은 리스크 관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틈만 나면 그룹이 위기에 봉착했다며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전 직원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구조조정 시절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절박하게 외치면서 직원들을 독려했던 것은 유명하다. 그 후엔 수익이 나지 않는 계열사는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청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긴장감을 조성했다. 그의 위기의식은 그룹이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룹을 둘러싼 경영 환경이 “단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는 위기의 연속”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최근 계열사 임직원들을 태국으로 불러들여 ‘철새의 생존본능’을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먹이를 찾아 먼 길을 나서는 철새처럼 해외 진출에 성공해야만 그룹의 내일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김 회장의 판단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