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고민했었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라고 번갈아가며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1초도 걸리지 않고 ‘아버지’라고 쓰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너무 늦었다는 것이고, 그로부터 아버지는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아버지는 강원도 산골의 지지리 가난하게 사는 집에서 4남 3녀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는 막내로 태어났다. 학교에 간 날보다는 집에서 농사일을 도운 날이 훨씬 많았던 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가진 것 한 푼 없이 무작정 상경하셨다. 원체 약골이어서 농사일이 힘에 부치기도 했겠지만, 강원도 산골에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서울에 올라와서 경상도 산골 마을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태풍 피해를 보는 통에 먹을 것이 없어 무작정 상경하신 어머니와 만나 결혼하셨으니, 두 분의 신혼은 밑바닥 중의 밑바닥에서 시작된 셈이었다.아버지는 그야말로 일만 하셨다. 낮에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고 밤에는 ‘아이스케키’를 만드셨다. 이발을 하지 않는 날에는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어떤 날은 꼬박 밤을 새우고, 어떤 날은 한두 시간 겨우 눈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나와 여동생이 태어났고 아버지는 더욱더 열심히 일하셨다.아버지의 교육열은 유별났다. 갓난아기에 불과한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야 한다며 서울대 교정(지금의 대학로 마로니에 교정)에서 나에게 걸음마를 가르치셨다. 맹모삼천을 실천에 옮기셔서 서울대가 캠퍼스를 이전하자 사당동으로 집을 옮겼을 정도다.이사한 후에는 이발 일을 접으시고 연탄 배달을 시작하셨다.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직업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어쩌다가 리어카라도 밀어드리는 날에는 친구들과 마주치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다.아버지의 직업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될 정도로 철이 든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토록 바라시던 서울대 합격 소식을 알려드렸을 때도 아버지께서는 연탄을 배달하고 계셨다. 검댕이 묻은 새까만 얼굴로 환히 웃으실 때 눈동자와 치아만 하얗게 보였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대학에 들어가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통해 내가 한 사람의 몫을 감당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아버지께 힘든 연탄 배달 일을 그만두도록 설득했다. 완고하시던 아버지도 거듭된 설득으로 연탄 배달 일을 그만두시고 아파트 경비로 출근하셨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고 있던 차에, 아버지는 격일제인 경비 업무를 하시며 쉬는 하루를 그냥 쉬지 못하시고 다시 연탄 배달 일을 시작하셨다.밤을 꼬박 새우는 경비 일에 고된 연탄 배달 일을 겸하셨으니, 무리가 되지 않는다면 이상할 노릇이었다. 결국 내가 대학 3학년이던 해 가을 아버지는 뇌출혈 및 뇌경색, 흔한 말로 중풍을 맞고 쓰러지셨다. 그로부터 18년간 반신불수로 누워계시던 끝에 올해 봄 따스하니 날씨 좋던 날 새벽에 돌아가시고야 말았다.남들은 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 반신불수인 아버지를 18년간 지극 정성으로 병구완한 것에 대해 놀라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그 18년간의 정성도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준 무한한 사랑과 희생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다고 생각한다.요즘 들어 아버지의 이름이 붙은 장학기금을 만들었으면 하는 소원을 키워본다. 아버지의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처음 맞이하는 이 겨울, 연탄 배달로 겨울이면 유난히 바쁘셨던 아버지가 몹시 그립다.글 / 유연식 디지털큐브 대표1968년생. 1991년 서울대 지질과학과 졸업. 1993년 물리학과 석사. 1997년 물리학과 박사. 1994년 미국 페르미 입자물리연구소 초빙연구원. 1997년 삼성전기 입사. 2004년 디지털큐브 연구소장. 2006년 대표이사 겸 연구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