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서 기회찾는 ‘카오스 메이커’

“나는 혼란 제조기(chaos maker)다.”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65)은 스스로 혼란을 만드는 최고경영자(CEO)라고 부른다. 과거와 현재의 성과나 실적에 안주하거나 편안히 앉아 성공을 기다리는 자의 엉덩이를 걷어차 걷고 뛰게 하겠다는 의미다. 그의 남다른 각오는 삼성전자의 ‘남다른’ 실적으로 고스란히 옮겨갔다. 2000년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은 이후 삼성전자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거듭했다. 소니를 제치고 IBM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올해도 삼성전자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고유가에 환율하락, 엔저, 북핵 사태 등 대외적인 경영 환경이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1분기 1조6100억 원 매출에서 2분기 14조1100억 원, 3분기 15조2200억 원으로 상승세를 이어간 것이다. 브랜드 가치도 높아졌다. 컨설팅 업체인 인터브랜드와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2006년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162억 달러에 달해 세계 20위에 올랐다. 지난해 21위에서 한 계단 올라선 것. 전자 업체만 따지면 세계 1위다.삼성전자의 급성장을 이끈 것은 무엇보다 기술력이다. 한발 앞선 기술과 제품으로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지난해도 전체 매출의 7%에 해당하는 54억2800만 달러(세계 11위 규모)를 기술 개발에 투자하는 등 기술 경쟁력 확보의 끈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올해만도 40나노 32Gb 낸드플래시 개발, 휴대 인터넷 와이브로의 미국 진출, 4세대 이동통신기술 세계 최초 시연 등 굵직굵직한 뉴스를 만들어냈다. 시설 투자도 2004년 7조6700억 원에서 지난해 10조400억 원, 올해 10조2400억 원으로 늘려가고 있다.이제는 세계가 인정하는 기업으로 자리 잡았지만 윤 부회장은 만족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미래이지 현재가 아니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매출, 이익, 브랜드가치 등 모든 면에서 소니를 앞질렀지만 정작 윤 부회장은 시큰둥하다. 그게 뭐 대수냐는 분위기다. 중요한 것은 경쟁사를 한때 앞섰다는 게 아니라 장기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느냐 여부라고 강조한다.역설적이지만 윤 부회장은 ‘위기의 CEO’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삼성전자는 언제라도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다그친다. “나는 위기의식을 새로운 도약을 위한 동력으로 삼고자 노력했고 어느날 우리가 파산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늘 지니고 일했다.”윤 부회장의 위기의식은 사실 괜한 노파심이 아니다. 반도체, 휴대전화, LCD 등 삼성전자의 주력사업은 모두 만만치 않은 도전을 받고 있다. 실제로 이익과 점유율이 하락하기도 했다. 외환위기 당시 생존을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해야 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윤 부회장이 신속한 일처리,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되풀이해 강조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윤 부회장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답으로 제시한다. 어떤 문제든 열심히 연구하고 경험하고 토론하고 고민하면 결국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직무에 임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 윤 부회장은 믿는다.윤 부회장의 ‘격물치지’는 1980년대 초반 그가 주도한 VCR 개발에서 빛을 발하기도 했다. 아무런 기술적 기반이 없던 상태에서 당시 전자기술의 총아로 불린 VCR를 개발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하지만 윤 부회장은 특유의 ‘격물치지’를 발휘, 결국 세계에서 4번째로 VCR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 최고의 테크노 CEO’라는 별칭은 ‘격물치지’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1941년생. 62년 경북대사대부속고 졸업. 66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66년 삼성그룹 입사. 84년 삼성전자 상무. 88년 전자부문 부사장. 90년 가전부문 대표이사. 97년 총괄 대표이사 사장. 2000년 대표이사 부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