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유통채널·가격경쟁력 확보해야

최근 국내기업들의 가장 큰 전략적 도전과 이슈는 무엇인가? 답은 바로 ‘성장’이다. 한국은 과거 8% 이상의 고도성장 국면에서 벗어나 이제 연간 4~5% 수준의 저성장 단계로 접어들었다. 최근 맥킨지가 지난 1994년에서 2003년까지 10년간 미국의 상위 100대 기업의 성과를 분석해 본 결과, GDP 성장률에 못미치는 성과를 거둔 기업들은 이를 초과하는 성장을 한 기업에 비해 인수되거나 시장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5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S&P500을 초과하는 TRS(Total Return to Shareholder, 주주가치수익률)를 기록했다 하더라도 GDP 성장률에 못미치는 매출성장을 한 기업들 중 32%가 2003년 말 시장에서 사라졌다.한국의 경우 과거 수년간의 매출성장이 최소 연 5% (GDP 성장률)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기업 혹은 향후 그 정도의 매출성장을 달성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의 3분의 1은 향후 10년 내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줄어드는 인구와 국내 소비의 한계를 고려할 때 내수시장을 대상으로 그 정도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많은 국내기업, 특히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에 과연 어떻게 자신의 역량·기술을 활용해서 보다 큰 성장이 예상되는 해외 신흥시장에서의 성공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해 먼저 고찰해 봐야 한다.신흥시장은 2023년까지 전세계 GDP 성장의 40%, 그리고 전체 인구 성장의 94%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인 신흥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과 인도의 성장은 괄목할 수준이다. 내수시장에서의 성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소비자의 특성, 유통, 그리고 경쟁상황의 축으로 살펴 볼 때 중국, 인도와 같은 신흥시장들은 여타의 선진국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첫째, 소비자 측면에서 양국은 모두 선진국에 비해 소득불균형의 정도가 심하며 저소득층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둘째, 중국과 인도는 공히 근대적인 유통시스템과 전통적인 유통시스템이 공존하게 되면서 매우 복잡하고 세분화된 유통채널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경쟁상황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진화된 다국적기업들과 저가를 무기로 한 현지기업들이 시장에 공존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신흥시장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러한 차이점을 고려해 볼 때 신흥시장에서의 우수사례(Best Practice)는 새롭게 정의돼야 한다. 우선 소비자 측면에서 볼 때 기업들은 중국과 인도의 신흥 중산층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주목해야 한다. 중산층을 배제하게 되면 고가 시장의 니치 플레이어로 남게 되어 커다란 성장의 기회를 놓치게 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저가 시장에서 성장해 온 현지기업들에 수익성이 좋은 고가 시장마저 위협받게 될 수 있다.둘째, 현재 신흥시장의 유통환경을 고려한 독창적인 유통전략이 필요하다. 인도의 경우 약 1,200만개의 소규모 잡화점이 소매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중국 현지의 유통업체들은 다국적기업이 기대하는 수준의 영업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니레버는 인도에서 제3자가 운영하는 20여개의 유통센터를 통해 7,000개 이상의 유통업자에 접근하고 다시 이들이 800만개의 소매점을 커버하는 전략을 활용했다.셋째, 경쟁의 측면에서 브랜드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현지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가격경쟁력과 이를 합리화할 수 있는 비용구조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신흥시장에서 일부 제품 카테고리의 경우 시장과 수요 자체를 창출해야 하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 형성 초기에는 많은 소비자의 진입이 가능하도록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가격 책정이 요구된다.앞서 재정의한 우수사례는 신흥시장이라는 특징을 가진 중국과 인도에서 경쟁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을 다룬 것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경쟁전략은 개별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정의돼야 한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현지화의 정도와 기업이 이를 독자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역량과 의지라는 척도로 살펴볼 때 기업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진입하려고 하는 신흥시장이 전체적인 글로벌 전략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시장이고 이미 시장이 개발돼 있으며 강력한 현지기업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기업은 어댑터(Adapter)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해당 신흥시장이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 이 시장을 공략하는 데 보다 현지화된 접근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시장규모가 큰 만큼 이미 강력한 글로벌·현지 기업이 경쟁자로 존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시장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단기간에 진입해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다.반면 현재 신흥시장의 규모가 작고 기업의 글로벌 전략상에서도 중요한 시장이 아니라면 다른 방식의 접근이 요구된다. 아직 시장의 규모가 작은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활용되는 제품을 시장에 소개하는 수준으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높은 수준의 현지화에 필요한 대규모의 투자를 피하면서 기업은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고 미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위상을 시장에서 확보해 나가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시장을 배울 시간을 확보하면서 향후 현지화에 필요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상황에 맞는 전략 추구해야하지만 진입하려는 시장이 현재로서는 그 규모가 작다 하더라도 향후 거대한 성장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단기적으로 기업에 가장 중요한 시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다른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특히 소비자를 교육시켜서라도 시장을 형성할 의지가 있고 이를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마켓 형성자(Market Shaper)가 되어 소비자 교육과 시험 구매를 유도해 시장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는 제품을 새롭게 시장에 선보여 받아들이게 한다면 강력하고 독자적인 지위를 시장에서 구축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시장이 이미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기업이 소비자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시장을 지배할 자신이 있다면 로컬 인사이더(Local Insider)로 자리잡는 방안이 있다. 로컬 인사이더는 현지에서 경쟁력 있는 비용구조를 달성하는 동시에 세계 수준의 비즈니스 시스템을 보유해 현지화된 제품을 업계 최고 수준의 경영시스템을 통해 시장에 선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신흥시장에서 성공한 기업들은 이처럼 다양한 전략적 입지를 그들이 공략하고자 하는 시장에 따라 다르게 결정해 왔다. 더 나아가 같은 시장에서라도 반드시 기업의 모든 사업부에 같은 전략을 일괄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P&G는 중국 시장에서, 일반적인 생활용품 분야에서는 로컬 인사이더로서 산업 전체를 선도하고 있지만 아직 초기 단계인 기저귀 부문의 경우에는 마켓 형성자로서 시장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동시에 기업은 시장 내에서 스스로의 상황을 끊임없이 재검토하고, 시장상황의 변화가 감지되면 이에 따라 그 전략 역시 수정하는 유연한 태도를 확보해야 한다. 일례로 세계적인 식품기업 네슬레는 80년간 인도에서 커피, 시리얼, 유아식 등에서 전문 플레이어로 활동하다가 인도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인도의 독특한 요거트 문화에 부합하는 유제품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로컬 인사이더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매력적인 신흥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 기업들이 과거의 사례들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흥시장은 선진시장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에 필요한 초기투자와 차별화된 운영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과거 선진국 시장에서의 성공사례를 답습하는 안이한 자세로는 신흥시장에서의 성공을 기약하기 어렵다. 둘째, 신흥시장의 진정한 가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고객의 저변을 저소득층까지 확대하고, 강력한 유통채널과 가격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고가 제품으로 고소득층만을 노리는 전략이 과연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현지기업과 장기적으로 경쟁하는 데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절한 사업영역을 선택하고 시장상황에 부합하는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모든 시장, 제품, 브랜드에 동일한 전략을 채택해서는 안된다. ‘로컬 인사이더’ 혹은 ‘마켓 형성자’가 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큰 보상을 줄 수는 있지만, 이는 더 높은 수준의 경영진의 의지와 기업의 역량을 필요로 하고 각각의 시장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김상범 맥킨지 서울사무소 부파트너·김강세 맥킨지 서울사무소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