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S 비율 8%’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의 운명을 가르는 잣대가 됐다.이 기준에 미달한 은행들은 모두 퇴출돼 사라졌다. 지금도 은행들은 BIS 비율에 촉각을 곤두세운다.외환은행 ‘헐값매각’ 논란에서 BIS 비율 조작 여부가 쟁점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이 BIS 기준이 2008년부터 대폭 강화된다.신BIS협약(일명 ‘바젤2’)이 국내에서 시행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권 전반에 큰 파장이 예상된다.일각에서는 ‘2008년 괴담’까지 흘러나온다.신BIS협약(이하 ‘바젤2’) 국내 시행시기가 2008년 1월1일로 결정되면서 은행권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각 은행들은 전담부서를 신설하고 대응책 마련을 위한 컨설팅 용역과 전산 시스템 구축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올해 대부분의 은행이 사상 최대 순이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배당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젤2가 몰고 올 ‘폭풍’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박봉수 전 기술신용보증보험 이사장은 “바젤2는 우리나라 금융시장을 완전히 바꿔놓을 ‘제2의 흑선’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BIS협약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에게도 익숙한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을 산정하는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BIS제도는 국제결제은행(BIS) 회원국을 중심으로 88년 처음 도입됐으며, 92년부터 8% 유지가 의무화됐다. 2008년 국내에서 시행되는 신협약은 기존 제도를 대폭 강화한 것이다. 스위스 바젤에 있는 BIS 산하 바젤금융감독위원회가 이를 주도해 ‘바젤2’로 불린다.◇어떻게 바뀌나 =바젤2는 자체적으로 리스크 관리 능력을 갖춘 선진은행에는 더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은행에는 자본 부담을 강화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리스크 관리 능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내은행들에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바젤2가 시행될 경우 국내은행들의 BIS 비율이 하락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BIS제도는 돈을 빌려준 업체의 부도 등으로 손실이 생기더라도 은행이 이를 감당할 수 있게 대출금(자산)에 비례해 적정 규모의 자기자본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단순화하면 BIS 비율은 자기자본을 총자산으로 나눠 산출한다. 이때 리스크가 큰 자산에 대해 더 많은 자본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각 자산별 위험 가중치를 곱하게 된다. 바젤2는 이 위험 가중치를 한층 세분화했다. 그동안 은행들은 기업 대출에 대해 똑같이 100%의 위험 가중치를 부여했다. 이를테면 우량기업인 삼성전자에 빌려준 돈과 부도 위험이 높은 다른 기업에 준 대출금에 똑같이 100%의 가중치를 부여한 것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자본 부담이 똑같기 때문에 삼성전자보다 리스크가 커 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다른 기업에 대출해 주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바젤2는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개별 기업의 신용등급을 평가해 위험가중치를 부여하도록 했다. 은행들은 외부 신용평가기관의 평가등급을 그대로 적용하는 ‘표준방식’과 자체적으로 구축한 신용평가 시스템으로 매긴 신용등급을 적용하는 ‘내부신용등급 평가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표준방식을 채택할 경우 자본부담이 더 늘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자체적인 리스크 평가 능력이 뛰어난 은행은 자본 부담이 줄어 투자여력이 커지는 반면, 그렇지 못한 곳은 불리해지는 것이다.바젤2는 기존의 신용 리스크와 시장 리스크 외에 운영 리스크까지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운영 리스크는 직원의 횡령이나 시스템 장애, 각종 소송 등으로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앞으로 은행이 관리해야 할 리스크의 대상이 대폭 확대되는 것이다. 또한 감독당국의 감독기능을 강화하고, 리스크와 관련된 세부 정보를 공시하도록 해 시장에 의한 감시가 이루어지도록 했다.◇중소기업 돈줄 막히나 = 2008년 바젤2 시행에 그동안 반대의견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우려는 상대적으로 신용이 낮을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지난 10월 신용보증기금이 낸 자료는 이런 우려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신용보증기금이 자체적으로 산출해 본 결과 바젤2를 적용하면 은행들의 신용위험 가중 자산이 31.7%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되면 은행들이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에 대출을 더 꺼리게 돼 중소기업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16개 은행 실무 담당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37.5%가 바젤2가 시행되면 중소기업 대출이 위축될 것이라고 답했다.하지만 금융당국의 판단은 다르다. 금융감독원은 외부 연구용역 결과 바젤2가 도입되면 중소기업 여신의 위험 가중치가 현재보다 오히려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다. 바젤2 최종안 확정과정에서 독일 등 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나라들의 반발로 중소기업 우대 조항이 포함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금융감독원측의 설명이다. 매출액 600억원 이하이고 대출잔액이 10억원 이하인 중소기업 대출은 소매금융으로 분류돼 위험가중치가 현행 100%에서 75%로 오히려 낮아진다.그러나 이 기준에 따라 혜택을 볼 수 있는 중소기업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다. 대출액 10억원 이하인 기업은 개인 자영업자나 영세기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바젤2가 도입되면 신용관리가 잘 안되는 중소기업 대출은 당연히 어려워진다”며 “단기적으로 상당한 충격이 예상된다”고 말한다. 어쨌든 바벨2 도입으로 자금시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불가피할 전망이다.◇은행들 주택담보대출로 몰린다 =바젤2는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위험가중치를 현행 50%에서 35%로 낮췄다. 이에 따라 은행들의 공격적인 주택담보대출 영업이 우려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BIS 비율 산정에 유리해지기 때문에 은행들로는 ‘건전성 확보’와 ‘안정적인 이자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기를 잡을 수 있다.한국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신용 리스크 측정방식 가운데 ‘고급 내부등급법’을 적용하면 주택담보대출 위험가중치가 최고 10%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기업 대출은 국가신용등급과 동일한 수준의 신용등급을 가진 우량기업을 제외하곤 대출의 위험 가중치가 더 높아진다. 이에 따라 은행들이 BIS 비율 산정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기업 대출 비중을 줄이고 주택담보대출에 더욱 치중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주택담보대출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은행권 ‘2008년 괴담’ 떠돈다 =요즘도 은행권에는 ‘BIS 비율 8%’ 이야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BIS 비율 8%’의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못 맞춘 대동은행, 동남은행, 동화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이 퇴출됐고,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합병되는 운명을 맞았다. 살아남은 은행들도 한동안 BIS 비율 끌어올리기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거기에 비하면 최근 은행들의 상황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올 상반기 시중은행들의 평균 BIS 비율은 사상 최고 수준인 13.18%를 기록했다. 이는 미국(12.4%), 영국(12.3%), 독일(12.9%) 등 선진국보다도 높은 수치다.그러나 바젤2가 도입되면 은행들의 BIS 비율이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관리 대상 리스크가 확대되고, 세분화되기 때문이다. 새로 도입되는 운영 리스크의 경우 대부분의 선진국 은행들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바젤2 도입이 시중은행들의 BIS 비율에 미치는 영향이 1%포인트 내외에 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장담하기는 아직 이르다.또한 단순히 BIS 비율 하락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바젤2 도입은 은행산업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리스크 관리 능력이 뛰어난 우량은행으로 돈이 몰릴 가능성이 높다. 기업들이 자사의 신용을 제대로 평가해주고 대출금리, 액수, 만기를 우대해주는 은행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리스크 관리 능력이 뛰어난 은행은 불필요하게 자기자본을 과잉으로 쌓을 필요가 없게 돼, 이를 좀더 수익성이 높은 자산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른 경쟁은행에 비해 수익성이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실력’에 따라 은행들의 운명이 극명하게 엇갈리게 되는 것이다. q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INTERVIEW ./ 문종진 금융감독원 신BIS실장‘금융산업 도약 계기 삼아야’금융감독원 신BIS실은 바젤2 시행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2004년 10월 신설됐다. 세부적인 바젤2 도입 및 운영방안을 마련하고, 내부등급법을 채택한 은행들의 리스크 평가모델을 승인,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국민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등이 내부등급법 승인을 받았다. 문종진 실장(51)은 “바젤2는 전사적 리스크 관리를 요구한다”며 “바젤2 시행은 국내 은행, 기업들의 리스크 관리 능력이 한 차원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바젤2 시행 꼭 필요한가.물론 우리나라는 BIS 회원국은 아니다. 하지만 BIS제도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현행 BIS제도도 13개 회원국만 의무적으로 따르게 돼 있지만, 실제로는 세계 100여개 나라가 이를 규범으로 삼고 있다. 축구에서도 국제대회에 나가려면 국제 룰을 따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제금융시장에서 거래하고, 수출입 금융을 하려면 바젤2 도입이 불가피하다.중소기업 대출위축 우려는.바젤2 최종안 확정 과정에서 중소기업 우대조항이 들어가 오히려 유리해진 측면이 많다. 중소기업이 불리하다는 건 오해다. 신용보증기금에서 중소기업 대출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냈는데, 신용보증기금에 보증서를 받으러 오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해 한계가 있다. 신용보증기금을 찾는 곳은 대부분 재무구조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우가 많다.주택담보대출 쏠림 현상은.기업 여신보다 주택담보대출이 손실 리스크가 적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지나친 주택담보대출 쏠림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바젤2에 ‘신용편중 리스크’ 항목이 들어 있는데 이게 제어기능을 할 수 있다.국내 은행이 선진국 은행들에 비해 불리하지 않나.후발 은행이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바젤2에 운영 리스크가 새로 추가됐는데, 선진국 은행은 이미 해 온 부분이다. 상대적으로 국내 은행들이 불리할 수 있지만, 이를 금융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단순히 감독당국에 보고하기 위해 BIS 비율을 산출하는 소득적인 대응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금리, 유동성, 평판, 전략 등 관리 대상 리스크가 엄청나게 확대됐다. 은행의 모든 부문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