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혜는 싫어요’… 경영능력 ‘굿’

‘열 명의 아들보다 잘 키운 한 명의 사위가 낫다.’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재벌가 사위들의 활약상이 돋보인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 여기는 재벌가는 드물다. 오히려 아들의 부족한 부분을 메어주거나 가문의 파워를 극대화시키는 ‘수혈’의 의미가 강하다. 물론 사위를 회사 경영에 끌어들이는 재벌가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다. 재벌가의 결혼이 주로 또 다른 재벌가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 재벌가가 사돈, 겹사돈의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딸만 있는 집안이거나, 딸에게도 회사를 물려준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사위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 기업을 살찌운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에는 시대흐름을 좇아 자유연애를 선호하는 딸들이 늘어난 것도 사위들의 경영참여가 활발해진 이유 중 하나다. 평범한 ‘평민’에서 일약 ‘상류층’으로 신분이 상승한 이들은 대개 경영수업을 받으며 ‘장인’의 낙점을 기다리고 있다.재벌가 사위들 가운데서도 대표이사 사장을 맡으면서 자신의 경영능력을 십분 발휘해 ‘스타CEO’로 떠오른 이들이 화제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캐피탈 사장(46)이 단연 돋보인다. 정 사장은 과감한 공격경영으로 적자회사를 흑자로 돌려세우며 ‘장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현대카드의 신용판매 점유율은 지난 9월 말 현재 12.5%다. 회사 설립 첫해인 2001년 10월 1.8%에 비해 5년여 만에 6배 이상 성장했다. 무엇보다 2003년 6,273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던 회사를 3년 만에 살려냈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77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 벌써 지난해 흑자규모(638억원)를 넘어섰다.정 사장은 정경진 종로학원 회장 큰아들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미국 MIT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87년 현대종합상사 기획실 이사로 현대가 경영에 합류했다. 이후 현대정공, 현대모비스, 기아자동차(자재본부장), 현대자동차(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를 거쳐 2003년 10월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CEO 취임 이후 튀는 감각으로 ‘카드업계의 이단아’라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모델들에게 미니스커트를 입혀 화제가 된 미니M,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는 CM송으로 유명한 현대카드W 등의 ‘튀는’ 스타일 광고가 그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정 회장의 셋째 사위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38)도 지난해 사장으로 승진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대하이스코는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만드는 업체다. 신 사장은 미국 캘리포니아루터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페퍼딘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95년 현대정공에 입사해 수출부에서 근무하다가 98년 현대하이스코로 옮겼다. 현대정공에 근무하던 시절 정 회장의 동갑내기 셋째 딸 윤이씨를 만나 결혼했다. 2001년 임원으로 승진했으며 2002년 관리본부 부본부장(전무), 2003년 영업본부장 및 기획담당(부사장)을 거쳐 2005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영업본부장 시절 1조원대에 머물던 연간 매출액을 2조3,000억원으로 끌어올리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장녀 채은정씨의 남편 안용찬 애경 사장(47)도 사위라기보다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더 인정받고 있는 경우다. 안 사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MBA과정을 밟았다. 87년 애경에 입사한 이후 애경화학 이사, 애경유화 전무, 애경 전무를 거쳐 95년 애경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CEO 취임 이후 10년 연속 흑자를 달성하는 등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회사 매출이 매년 평균 10%씩 지속적으로 늘어난 반면, 95년 당시 870%였던 부채비율은 올해 190%대로 뚝 떨어졌다. 애경그룹의 실질적인 경영을 지휘하고 있는 채형석 그룹 부회장(장 회장 장남)도 그의 이런 능력을 높이 사고 있다. 채 부회장이 “(안 사장은) 우리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어딘가에서 최고경영자로 일하고 있을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는 안 사장과 가족을 이뤄 그룹을 운영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후문이다.현재현 동양그룹 회장(57)과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51)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동양그룹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의 사위들이다. 고 이 회장은 딸만 둘을 뒀고, 자연스럽게 사위들이 그룹의 지휘봉을 잡은 것이다. 현 회장은 지난해 ‘부산 APEC 서밋’ 의장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면서 주목을 끌었다. 그는 경기 중·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한 수재다. 75년 부산지검 검사로 첫발을 내디딘 후 고 이 회장의 장녀인 이혜경 동양레저 부회장과 결혼, 법조인에서 경영자로 옷을 갈아입었다.그는 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동양그룹에 입사해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학자풍인 현 회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늘 입가에 잔잔히 미소를 머금고 있다. 하지만 경영자로서는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룹의 주력인 동양종금증권·동양생명·동양투신운용 등 금융부문이 외환위기 여파로 가시밭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감한 구조조정과 혁신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났고, 안정궤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동양그룹에서 분가한 오리온그룹의 담 회장은 차녀 이화경 오리온그룹 엔터테인먼트 사장의 남편이다. 담 회장은 2001년 동양그룹에서 독립한 오리온그룹을 급성장시키며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줬다. 2001년 7,667억원에 불과했던 그룹 매출액이 지난해 1조6,539억원으로 급증했다. 이는 제과업 중심에서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사업다각화에 힘쓴 결과다. 이미 비제과업 매출이 제과업 매출을 앞질렀고, 올해는 엔터테인먼트로 거둬들일 돈이 제과업 매출보다 클 전망이다.담 회장은 조용하고 합리적인 스타일이다. 능력 있는 인재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그의 경영스타일이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구상할 때 끼가 있는 20대 젊은이들로 신규 사업팀을 구성하고 20억원을 투자한 사례는 유명한 일화다. 당시 구성원들은 현재 그룹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핵심인물인 김성수 온미디어 대표, 문영주 롸이즈온 대표, 김우택 미디어플렉스 대표 등이다. 하지만 경영 현안에 대해서는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늘 ‘스마트 경영’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마트 경영’은 핵심 20%를 찾아 잘되는 곳에 더 힘을 실어주고 되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버려 상향 평준화를 지향하는 것이다.이밖에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사위로는 박장석 SKC 사장(최종건 SK 창업주 사위)과 서정호 삼양식품 사장(전중윤 회장의 사위) 등이 있다.아직까지 대표이사급은 아니지만 경영수업을 받으며 미래의 CEO로 성장하고 있는 사위들도 여러명이다.삼성가의 사위들은 아직 대표이사까지 오른 이는 없지만 계열사 경영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지난 99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장녀 부진씨와 결혼해 화제를 모았던 임우재씨(37)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삼성전기 상무보로 경영진에 합류했다. 차녀 서현씨의 남편인 김재열씨(38·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 아들)도 2002년 제일기획에 입사해 상무보를 거쳐 제일모직 상무로 재직하고 있다.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외동딸 정유경씨의 남편인 문성욱씨(34)도 신세계I&C 상무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크라운제과 윤영달 사장의 사위인 신정훈 상무(35)도 눈여겨볼 만하다. 해태제과 인수작업을 주도한 신 상무는 해태제과 관리재정본부장을 맡아 핵심역할을 수행하고 있다.하지만 LG가, 코오롱가, 금호아시아나가 등은 딸들과 사위들의 경영참여가 거의 없는 상태다.LG가는 전통적으로 딸들을 경영에서 배제해 왔다. 이에 따라 사위들도 LG가와 무관하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두 명의 딸을 뒀는데, 대한보증보험과 대한펄프 등 재벌가와 결혼시켰다. 사위들이 LG 경영에 참여할 일이 없었다. 구본무 회장의 장녀 연경씨도 윤관 블루런벤처스 사장(31)과 결혼했다. 윤 사장은 알프스리조트 전 소유주였던 윤태수 회장의 아들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치고 현재 블루런벤처스의 공동 파트너로 근무하고 있다.블루런벤처스는 노키아(30%)가 한국의 벤처기업 투자를 위해 설립한 벤처캐피털로 운용자금만 1조원이 넘는다. 코오롱의 이동찬 명예회장은 슬하에 1남5녀를 뒀다. 5명의 사위를 얻었지만, 코오롱그룹에서 일하는 사위는 한 명도 없다. 이는 금호아시아나가도 마찬가지다. 지분은 아들에게만 상속하고, 딸은 물론 사위의 경영참여도 불가하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