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길러라’… 인재 중요성 강조

1970년 어느 날 인천제철(현 INI스틸)의 창업자이자 대한양회(문경시멘트)와 한국셀로판 등을 거느린 기업인 이동준씨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국에 갔다. 당시 그가 소유한 인천제철을 비롯해 그룹 전체가 갑자기 위기에 봉착했고 결국 산업은행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이회장이 위기에 처한 것은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설(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이 ‘이동준 회장이 김종필 계열’이라며 자금회수를 지시했다는 설)이 한몫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도의 충격으로 인한 울화병에 지병인 심장병이 도져 영국으로 날아갔던 것이다.이회장은 런던 히드로공항 세관심사대에 여권을 내밀었다. 그를 죽 훑어보던 통관원은 돌연 가방 등 모든 소지품을 샅샅이 조사했다. 무려 1시간 가량이나 조사를 당했다. 불쾌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자기 앞에 있던 일본인은 그냥 통과했기 때문이다.그는 영국 심장병 권위자에게 진료를 받으면서 공항에서 당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영국이 국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대뜸 그 영국인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당신네 국가는 야만국가인 모양이군요.”그는 무슨 말이냐고 의사에게 따졌다. 그러자 의사는 “일본은 노벨상을 받은 문명국가가 아닙니까. 한국은 그런 사람이 없죠. 그러니까 세관에서 당할 수밖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그럼 영국은 문명국가인가요.”“물론이죠. 영국에는 세계적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있지 않습니까.”이회장은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퇴계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위대한 철학자로 많은 저술도 있습니다. 당신은 퇴계선생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이회장은 영국인 의사로부터 “한국은 야만국가”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사업으로 번 돈을 몽땅 털어서라도 퇴계를 전세계에 알리자’고 결심했다.귀국한 이회장은 퇴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퇴계학연구원을 설립키로 했다. 명륜동에 있는 자기 집에다 ‘퇴계학연구원’을 연 그는 도쿄대학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교수 등 퇴계학 권위자들을 불러 국제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퇴계 알리기’에 본격 나섰다. 일본인 교수를 택한 것은 일본이 한국보다 퇴계학 연구에 앞섰던 현실 때문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72년에 일본에 ‘이퇴계연구소’가 창립되고 73년에는 경북대에 퇴계학연구소가 설립되는 등 국내외에 퇴계학 연구 붐이 번져나갔다. 이를 기반으로 76년에는 경북대에서 퇴계학 국제학술회의가 처음으로 열렸다.이회장은 다름 아닌 퇴계의 직계후손으로 차종손인 이근필씨와 5촌간이다. 퇴계가 한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러한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주자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은 퇴계지만, 주자학의 그늘에 가려 있었고 오히려 한국에서조차 퇴계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은 풍토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후손의 눈물겨운 노력에 의해 미국과 유럽 등 대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회장은 자신이 키운 기업을 내놓았지만 그보다 더 큰 ‘사업’을 이룬 셈이다.430여년이 지난 후에 퇴계의 이름이 전세계에 드러난 것은 ‘소원선인다’(所願善人多)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에 대한 ‘투자’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퇴계는 학문을 중시했지만 입신출세의 길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과 손자를 당시 과거 전문학원인 ‘거접’(居接)에 보내 과거를 준비하게 했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명분만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 정권의 실세들이 ‘분배’를 앞세우며 ‘성장’을 소홀히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데, 이들이야말로 퇴계에게 한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또 요즘 기업들은 당장 인력운용에만 치중한 나머지 임직원들의 재교육에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대학원에 진학하면 업무에 지장을 준다며 불이익을 주는 곳도 있다. 이런 기업이 미래에 경쟁력 있는 인재를 확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퇴계를 있게 하고 또 400여년이 지난 후에 그를 세상에 드러내게 한 것도 그 출발점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학문에만 힘쓰며 후손들의 교육에 소홀했다면 ‘퇴계학’은 전세계적 관심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퇴계를 보면서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큰 사업’이란 진정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