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깨!’vs‘못 깨!’…미로 속 달린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316번지 은마아파트. 올해 입주 27년째를 맞은 4,424가구 28개동 14층짜리 이 아파트는 고급아파트의 대명사 타워팰리스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파트로 통한다. 최근 몇 년 사이 강남 재건축의 대명사이자 집값 상승의 진원지로 지목되면서 미디어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아파트가 됐기 때문이다.지난 8월 말 건설교통부가 ‘재건축 판정을 위한 안전진단 기준 전면 개정안’을 마련하고 8월25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을 때도 은마아파트는 뉴스의 주인공이었다. 핵심내용은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했으므로 재건축 추진 거의 불가능’이라는 것.사실 이는 2004년 정부의 부동산 규제책이 본격적으로 쏟아지면서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다. 이번에도 ‘재건축 안된다’ 메들리의 하나로 보는 이가 적지 않다. 집중타에 확인사격까지 계속되니 마치 ‘공공의 적’처럼 이미지가 형성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렇다면 끊임없이 ‘꿈 깨라’를 요구받고 있는 은마아파트는 정작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상주인구 1만5,000명을 헤아리는 이 매머드 단지는 요즘 겉으로는 어느 때보다 조용한 모습을 하고 있다.▷‘부동산 규제 집합소’ = 은마아파트는 부동산 규제란 규제는 모두 적용되는 ‘규제 집합소’다. 재건축 대명사인 만큼 ‘주택시장 안정’ 테마가 모두 걸려 있기 때문이다.최근 나온 가장 ‘무거운’ 규제는 아무래도 재건축 개발부담금제 시행과 안전진단 강화. 우선 재건축으로 가구당 3,000만원이 초과하는 이익에 대해 최고 50%까지 개발부담금이 부과된다. 또 지난 8월25일부터 시행된 안전진단 기준 개정안에 따라 재건축 절차를 정상적으로 진행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번 개정안은 재건축 여부를 판정하는 안전진단 전단계인 예비평가 때부터 관리를 강화, 안전진단을 받기 어렵게 한 게 특징이다. 게다가 안전진단 평가기준도 강화돼 더욱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가 됐다.여기에 소형평형 의무비율과 임대아파트 의무건설비율 적용을 받아 수익성은 더 바닥으로 내려가게 생겼다. 지금대로라면 조합원분양분과 일반분양분을 합친 가구수의 60% 이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 국민주택으로 짓고, 늘어나는 용적률의 25%는 임대아파트로 지어야 한다.전체 공정의 80% 이상을 지은 뒤에야 일반분양을 할 수 있고 조합원은 재건축조합 인가일부터는 지위를 넘길 수 없다는 점도 적잖은 제약이다.▷‘유구무언, 관망하겠다’ = “내년 말까지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상책. 할말 없음.” 은마아파트 안팎에서 만난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두 문장으로 압축된다.2년여 전 소형평형 의무비율, 임대주택 의무건설 등의 고강도 규제가 발표됐을 때만 해도 은마아파트 단지와 벽면에는 항의성 현수막이 거칠게 나부꼈었다. 하지만 이어서 후분양제 실시, 재건축 개발부담금제 시행, 안전진단 강화에 이르는 규제책들이 발표되자 언제부터인가 은마는 ‘무대응’으로 돌아섰다. 급기야 올 초부터는 아파트 게시판은 물론 반상회에서도 재건축 이슈가 잦아들었다. 아예 입을 다문 것이다.2002년부터 31평에 거주하고 있는 김은숙씨(가명)는 그 이유에 대해 “이목이 집중돼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튈 이유가 없지 않냐”고 말했다. 또 “현 정부 아래에선 원하는 방식으로 재건축을 추진할 수 없으므로 다음 정권에서나 다시 시도해 보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어서 그저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다. 내년 말까지는 조용히 지켜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이야기다.단지 내 상가의 36개 중개업소도 ‘노코멘트’로 일관하는 중이다. 언론에 노출된 업소에 대한 견제가 대단한 까닭이다. 한자리에서 10년 이상 중개업을 하고 있는 S공인 N대표는 “언론에 인터뷰라도 하고 나면 무슨 자격이냐, 공인된 의견이 아니다 등의 비난이 집중되기 때문에 되도록 기자를 피한다”고 말했다. 외견상 조용해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인 셈이다.▷‘단기 5년, 장기 10년’ =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또 다른 국면이 있다. 은마아파트가 입을 다문 이유는 자포자기 격이 아니라 암중모색 차원이라는 것이다. 단지 주변 한 은행의 PB팀장은 “정권이 바뀌면 무조건 될 수밖에 없고, 가격은 평당 5,000만원 이상 거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는 ‘단기 5년, 장기 10년’이라는 말까지 나와 있다. 또 주민들은 “현재 예정된 용적률 210%가 상향조정돼 40층 이상 초고층아파트 재건축이 가능하며, 입지여건이 뛰어난 만큼 평당 4,000만원을 호가하는 인근의 도곡 렉슬에 뒤질 이유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전언이다. 각종 규제가 목을 죄고 있어도 기대감이 오히려 강해졌다는 이야기다.물론 사지도 팔지도 못하겠다는 진퇴양난 처지의 투자자도 적지 않다. 특히 연말까지 주택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다주택자들의 고민이 매물 출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주변 중개업소의 이야기다. 강남권에 집이 여러 채 있는 경우라면 은마아파트를 ‘매도 선순위’에 둔다는 것이다.이 와중에도 시세는 여전히 강세다. 31평형은 평균 9억500만원선, 34평형은 평균 11억1,500만원선으로 상반기 상승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S공인 N대표는 “최근 들어 매수자는 있는데 매물이 달리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 “급매물은 거의 소진됐다”고 전했다. 그는 “거래가 살아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특히 여름방학 동안 나타난 임대매물 품귀현상이 9월까지 이어져 가격 상승세를 뒷받침하고 있다. N대표는 “31평형의 경우 2년 전 2억원 이하 매물도 있었지만 지금은 4,000만원 이상 올랐다”면서 “계약갱신을 하면서 전세금을 올려주고 눌러앉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이런 움직임은 은행 대출창구에서도 감지된다. 한 은행 대치동지점 대출 담당자는 “상반기 300억원 정도였던 아파트담보대출이 하반기 들어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가 최근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밝혔다. 거래가 살아나는 조짐이 감지된다는 것이다.당분간 은마아파트는 ‘시간’과 ‘규제’의 줄다리기를 계속해야 할 입장이다. 고종완 RE멤버스 대표는 “내년 대선에서 강남 재건축 문제가 큰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규제책이 강남, 강북 형평에 맞지 않고, 강남 요지에 대한 고밀도 개발이 불가피한 만큼 적정수준의 규제완화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고대표는 “이것이 바로 잇단 집중타에도 은마아파트 가격이 내리지 않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q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돋보기/ 은마아파트는 어떤 곳?5년새 3배 오른 ‘강남 달동네’은마아파트가 강남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라고 생각하는 이가 적잖다. 은마만큼 잘 알려진 아파트가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하지만 정작 대치동에서 은마는 ‘달동네’로 통한다. 낡았다고 해서 ‘똥마’라고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길 하나 사이 이웃인 미도, 선경아파트 등의 주민들은 은마와 함께 ‘대치동 아파트’로 묶이는 것을 싫어한다는 후문이다. ‘급’이 다르다는 생각에서다.실제 은마아파트는 입주한 지 27년이나 지나면서 건물이 낡아 페인트가 벗겨지고 배관 등에 문제가 있는 집이 많다. 여느 대치동 아파트와 달리 주차장에 국산 소형차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입주민 가운데 70%가 세입자다. 대개 교육 때문에 지방에서 유학 왔거나 강북에서 이주한 이들이다.집주인들은 거의 주변의 다른 아파트에 산다. 이 때문에 단지 내에선 팔도의 사투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또 집을 소유하면서 거주하는 이들 중에는 60대 이상 노년층이 많다. 입주 후 계속해서 사는 터줏대감들이다.인근 은행 PB들은 은마아파트 거주자에 대해 “전국 평균으로는 중상위층, 강남 평균으로 중하위층”이라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강남에서 ‘가장 싼 아파트’였던데다 지금도 절대금액으로는 강남에서 그리 비싼 아파트가 아니기 때문이다.하지만 은마의 가격만 보면 상승세가 대단하다. 5년 전인 2001년 9월 31평형의 가격은 2억9,000만원이었지만 지금은 9억원을 넘어섰다. 34평형은 5년 전 3억5,000만원에서 지금은 11억원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