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8일 국내 PC업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굴지의 PC업체인 삼보컴퓨터가 법정관리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PC산업에서 중견업체가 설 공간이 급격히 축소될 것임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대기업, 해외의 글로벌 기업, 저가 제품을 생산하는 중국의 기업들이 한국 PC시장을 주도할 것이란 예측이 대세다.비슷한 일이 MP3플레이어업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삼성전자, 애플, 소니 등 글로벌 기업들이 그동안 주축을 이루던 중견업체들을 물리치고 시장의 주인으로 들어앉을 것이란 소문이 난무하다. 이런 현상은 IT시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장환경이 바뀌면서 몇몇 기업만이 살아남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시장들의 공통점은 기술 위주에서 마케팅 위주로 환경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마케팅 능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반면 대기업들은 풍부한 비즈니스 경험과 막강한 자본력, 인프라, 인적자원을 앞세워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대마(大馬) 독식시대가 열린 셈이다.PC업계 - ‘중견업체 씨가 말랐다’중견 PC업체들의 몰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올해만 해도 1월에 현대멀티캡이 부도를 냈고 4월에는 대표적인 중견업체인 현주컴퓨터가 문을 닫았다. 현재 남아 있는 중견업체는 주연테크컴퓨터, 대우컴퓨터 등이 고작이다.삼보컴퓨터의 추락은 과거 중견업체들의 실패와 차원이 다르다. 지난해 매출이 2조1,810억원에 이르는 국내 시장점유율 2위의 대기업이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적지 않을 것이란 예측이 우세하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부품업체들의 부실이다. 삼보에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들이 판로를 찾지 못해 주저앉는 사태가 벌어지면 남아 있는 업체들의 어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미 국내 PC부품업체들의 상당수가 사라진 상태다.중견 PC업체의 이미지 하락도 걱정거리다. 주연테크컴퓨터의 유지연 팀장은 “현주컴퓨터 부도 때도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많은 문의를 받았다”며 “한국 PC업체가 모두 부실하다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중견업체들이 차지하던 자리는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과 HP, 델 등 외국계 기업들이 채워가고 있는 실정이다. 시장조사업체인 한국IDC에 따르면 2002년 시장점유율 상위업체 10개 중 8곳이 국내업체였지만 2003년에는 6개, 지난해에는 5개로 줄어들었다.중견업체들이 열세에 몰리는 것은 세계 PC시장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미 성장기를 지나면서 시장규모가 위축된데다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기술보다는 마케팅이 주요 경쟁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기업의 브랜드 파워도 없고 가격경쟁력도 떨어지는 국내업체들이 위기에 빠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실제로 PC의 수출입 동향을 살펴보면 국내업체들의 위축을 실감할 수 있다. 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02년 16억6,300만 달러이던 데스크톱 PC 수출량은 2003년 15억3,900만달러로 꺾였고 지난해에는 절반 수준인 7억6,900만달러로 내려앉았다. 올해는 더 심각하다.지난 1분기 수출량이 1,600만달러로 3,320만달러이던 전년 동기의 절반도 안된다. 노트북의 사정도 별다르지 않다. 반면 수입액은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에는 마침내 수입액이 수출액을 앞지르는 상황이 벌어졌다.PC의 무역역조 현상이 반전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중국의 저가 제품과 브랜드 경쟁력이 뛰어난 글로벌 기업들이 더욱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LG전자나 삼성전자처럼 세계시장에서 이미 공고한 브랜드 경쟁력을 확보한 대기업 외에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중견기업은 사실상 없어 수출은 더 이상 ‘살길’이 아니게 됐다.하지만 생존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게 업계와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한국IDC의 권상준 연구원은 “국내업체들뿐만 아니라 가격경쟁력을 내세운 모든 PC업체들이 위기에 봉착해 있다”며 “하지만 PC에 대한 수요는 늘 있기 마련이므로 외국계 기업의 취약 부문인 서비스와 유통망을 강화하고 자사만의 브랜드 전략을 구축해 강력히 실행하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권연구원은 업계의 위축에도 건재한 주연테크컴퓨터에서 생존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국 720여개 대리점망과 37개 서비스센터, 46개의 서비스 지정점 등 대기업에 버금가는 판매 및 애프터서비스(AS) 인프라가 강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할인점, 홈쇼핑 등 유통망을 더욱 확대하는 한편 조달시장 진출에도 사력을 모으고 있다. 내실위주의 경영도 돋보인다. 무리하게 외형을 확대하기보다는 마진위주의 경영을 중시한 결과 91년 창사 이래 단 한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MP3플레이어업계 - 구조조정은 시작됐다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MP3플레이어의 종주국이다. 특히 플래시메모리 타입의 제품은 한국이 세계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할 정도로 강력한 시장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의 이런 결과는 새로운 시장에 과감하게 도전한 벤처기업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하지만 고속성장을 이어가며 콧노래를 부르던 MP3플레이어업계에 시름이 늘고 있다. 좋은 시절은 가고 고난의 시절에 들어섰다는 푸념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100여개 가까이 되던 업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며 “조만간 몇몇 업체를 제외한 대부분 중소업체들이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고 업계의 위기감을 전했다.위기의 실체는 역설적이게도 시장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의 공간으로 인식되던 MP3플레이어 시장이 확대되면서 대기업들도 이 시장에 진출하고 있는 것. HDD형 MP3플레이어의 세계 최강자인 애플은 국내업체들의 텃밭인 플래시메모리 타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고 일본의 소니도 출사표를 던졌다. 국내에서는 삼성전자가 사업 본격화를 발표했고 그동안 이 시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LG전자도 제품을 내놓은 상태다.문제는 대기업이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경쟁방식이다. 대기업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저가 전략을 취하고 있다. 물론 모든 제품에 대한 전략은 아니지만 업계에 미치는 파장은 만만치 않다. 플래시메모리 타입 제품의 맹주인 레인콤의 1분기 실적에서도 이런 사실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아이리버 브랜드를 생산하고 있는 레인콤은 창사 이래 눈부신 성장을 이어오고 있는 기업이다. 하지만 지난 1분기 최초로 경상이익 적자를 기록하며 성장신화에 종지부를 찍은 게 아니냐는 우려를 사고 있다. 이 회사의 김동환 홍보과장은 “비수기여서 매출이 준데다 마케팅 비용이 다른 시기에 비해 많은 게 이유였다”며 “2분기에는 매출이 회복되고 비용도 대폭 감소될 예정이어서 흑자전환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1분기의 부진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하지만 대기업의 가격공세가 장기화된다면 시장점유율 1위인 레인콤도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고가정책을 유지하면서 마진을 확보한다는 레인콤의 전략이 수정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레인콤측도 인정하는 시나리오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소업체는 이미 위기에 처해 있다. 취약한 브랜드 파워를 보완하기 위해 벌써부터 저가전략을 구사한 결과 채산성이 형편없이 떨어진 상태다.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소 연간 100만대를 판매하는 업체의 경우 마진율 하락이 위기를 불러오지는 않는다”면서 “그 이하인 경우에는 채산성 악화는 물론 부품수급에도 적잖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우려했다.실제로 국내 MP3플레이어 시장에서 중소업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레인콤의 조사에 따르면 레인콤, 삼성전자, 코원시스템 등 상위 3사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상반기 71%에서 하반기에는 80%로 무려 9%포인트나 증가했고 지난 1분기에는 81%까지 늘어난 상태다. 수십개에 이르는 중소업체의 몫이 겨우 20%에 불과한 것. 현재는 더 줄어 10%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있을 것이라고 업계는 추정한다. 여기에 4~5위 업체의 점유율을 고려하면 실제로 중소업체의 점유율은 5%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하지만 중소업체들에는 이렇다 할 카드가 없다. 무작정 저가전략을 따라갈 수도 없고 브랜드 경쟁력도 없다. 레인콤처럼 중국에 공장을 건설,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형편도 아니다. 한 중소업체의 관계자는 “결국 특화된 제품으로 틈새시장을 개척하는 길 외에 방법이 없다”면서 “머지않아 업계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가 몇 개의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인터넷 포털업계 - 독점화 ‘점입가경’“아이디어만 좋으면 성공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더 이상 벤처가 주도하는 시장이 아닙니다. 아이디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적ㆍ물적 인프라를 갖춘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싸이월드를 운영하는 SK커뮤니케이션즈의 권창현 홍보팀장은 인터넷 사업은 이미 산업의 한축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자금력이 부족한 신생업체가 성공하기 매우 어려운 분야가 됐다고 분석한다. SK커뮤니케이션즈에 합병되기 전 싸이월드가 회원 250만명을 모으는 등 우수한 사업모델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수익을 내지 못하다가 합병 후 수익이 급속히 증가한 것이 단적인 예라는 설명이다.사실 인터넷 포털업체들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코스닥 황제주인 NHN과 전국에 ‘싸이질’이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키며 대히트를 친 SK커뮤니케이션즈가 사상 최대의 실적을 이어가는 반면, 다른 업체들은 성장이 정체되거나 퇴보하고 있다.NHN, 다음커뮤니케이션, SK커뮤니케이션즈 등 선두업체들은 국내시장의 성공을 발판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지만 중하위권 업체들은 생존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만으로 숨이 찬 것이다.시장점유율도 일부 선두기업에 몰리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NHN은 주력 서비스인 검색에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 인터넷 시장조사업체인 코리안클릭에 따르면 NHN의 검색서비스 시장점유율(체류시간 기준)은 지난해 5월 56.23%에서 지난 4월 71.13%로 1년 사이에 14.9%포인트나 증가했다. 현재의 상승세라면 점유율 80%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업계는 점친다.싸이월드는 더 막강하다. 한때 88.83%에 이르던 이 사이트의 점유율은 유사 서비스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면서 다소 주춤하긴 하지만 지난 4월 81.86%를 기록, 초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주간 페이지뷰는 35억건으로 2위업체에 비해 32배나 많다는 게 회사측의 주장이다.NHN의 검색서비스 독주는 경쟁사에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NHN이 검색서비스에서의 강력한 지배력을 바탕으로 광고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수록 경쟁사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특히 검색 외에 별다른 경쟁력을 보유하지 못한 엠파스는 그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검색을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와 수익원이 있고 야후도 막강한 자금력을 갖추고 있어 타격이 적지만 이도저도 아닌 엠파스는 사정이 좋지 않다.최근 엠파스는 의욕적으로 진출한 게임서비스에서 실패한 이후 검색서비스에 승부를 걸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긴 했지만 결과에 대한 예상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더욱이 매분기 20억~30억원의 영업이익 적자를 내고 있어 M&A 관련 소문이 돌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 세계 검색시장의 왕자인 구글이 한국시장에 본격 진출할 경우 엠파스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게 업계의 예측이다.기존 업체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마당에 신규업체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만큼 인터넷 포털업계의 진입장벽은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은 매우 위협적이다. 세계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막강한 자금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한국시장을 공략한다면 설사 NHN이라도 쉽지 않은 게임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열린 시장이다. 신생기업이나 하위업체에도 기회는 늘 있다. 기존의 성공한 모델과 유사한 서비스로 승부를 하는 것은 무모하지만 전인미답의 혁신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싸이월드의 성공이 그랬다. 인터넷 포털업계에도 ‘블루오션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