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미국 경제성장의 80%는 기술적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이런 주장이 아니더라도 기술발전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 이후 경제성장의 20% 이상이 기술발전에 따른 결과라는 연구보고가 있다.특히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국제간 기업들의 경쟁이 더욱 첨예해진 최근에는 기업의 기술력은 생존 티켓에 다름 아닌 것이 현실이다. 특허가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특허 증가에 따라 지식자본이 1%포인트 상승하면 경제성장률이 0.11%포인트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 또 1,000개의 특허출원은 약 4,460억원의 국민소득 증가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기술이 곧 ‘목숨줄’인 시대에 각국의 기업들이 지식재산권(지재권) 확보와 보호에 열을 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신의 기술을 배타적으로 보호받을 뿐만 아니라 수익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격화되고 있는 국제간 특허분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90년대 이전까지 국내기업들은 특허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보호받을 만한 기술도 없었고 단순조립 생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남의 특허를 침해할 소지도 많지 않았다. 더욱이 경제규모가 작아 특허를 가진 기업과 국가들에 위협적으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90년 이후 기술, 경제규모, 제품력 등이 발전하면서 우리 기업들도 특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런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전자ㆍ정보통신업계, 특허출원 주도2003년 이후 특허출원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2003년 12.1%에 이어 2004년에는 17.4%로 증가폭이 더욱 커졌다. 지난 1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21.5%나 불어났다. 특히 외국인보다 내국인의 출원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외국인 출원 증가율이 17.4%인 데 비해 내국인은 23.2%에 이르렀다.출원 급증을 주도하고 있는 경제주체는 기업들이었다. 지난 1분기의 경우 상위 5개 기업의 출원 증가율은 43.8%에 달해 전체 평균을 크게 앞질렀다. 특히 삼성SDI는 무려 114%나 증가했다. 업종별로는 전자ㆍ정보통신기업이 많았다. 삼성전자, LG전자, 삼성SDI 등 상위 10개사 가운데 9개사가 전자ㆍ정보통신기업이었다. 이는 최근 이 분야에서 기술경쟁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국내특허뿐만 아니라 국제특허 출원도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특허협력조약(PCT)에 의한 국제특허출원이 전년 대비 19.3% 늘어난 3,521건에 달해 세계 7위, 개발도상국만 대상으로 하면 1위에 올랐다. 특히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각각 374건, 314건을 출원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이와 관련, 특허청은 현재의 속도가 유지되면 향후 5년 내 한국은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의 특허 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내다봤다.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출원, 등록한 특허도 늘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2003년 미국에 국내기업이 출원한 특허건수는 7,071건으로 4위를, 등록된 특허건수는 4,198건으로 5위를 차지했다. 출원과 등록 순위 모두 전년도에 비해 두 계단 올라선 결과다. 또 미국 지재권자협회에 따르면 미국 내 300대 특허 다등록 기업에 10개의 국내기업이 포진해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1,313건을 등록, 13위에 올랐다.국제출원, 등록된 특허의 상당수는 전자ㆍ정보통신 분야에 속한다. 그만큼 이 분야에서 우리 기업의 기술경쟁력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의 특허도 증가 추세다. 21세기 간판산업으로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는 생명공학 분야의 경우 특허출원 건수가 88~91년 6건에 불과한 데 비해 2000~2003년에는 204건으로 무려 34배나 불어났다.특허는 중요한 수익원특허는 단순히 자신의 독자적 기술을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중요한 수익원으로도 기능한다. 흔히 말하는 ‘로열티’가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의 기술을 사용할 권리를 주는 조건으로 일정 금액을 받을 수 있어 아무런 생산활동을 하지 않고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훨씬 많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최근 들어 로열티를 받는 기업들이 늘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기술무역수지 부문에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이 적자폭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 커지고 있어 우려된다. 2003년의 경우 8억1,600만달러를 수출하고 32억3,650만달러를 수입해 24억2,050만달러의 적자를 냈다. 전년도에 비해 16.2% 증가한 수치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수입액보다 수출액의 증가율이 더 크다는 점이다. 2003년 수출액은 27.9% 증가했고 수입액은 18.9% 늘어나는 데 그쳤다.국가별로 보면 미국(2003년 기준 17억2,230만달러), 일본(4억1,620만달러), 독일(1억4,880만 달러) 등 기술선진국과 무역에서 적자를 많이 냈다. 반면 중국, 인도네시아에서는 각각 2억5,400만달러, 5,930만달러의 흑자를 냈다.기술무역을 주도하는 업종은 전기전자산업으로 나타났다. 2001년 이후 수입액이 전체의 53~57%를, 수출액은 65~68%에 이른다. 무역수지 면에서는 1억1,13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 전체의 48.2%를 차지했다.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의 정해혁 조사연구팀장은 “우리나라의 경우 주력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해외기술 의존 비중이 높아 생산활동이 늘어날수록 기술도입액이 병행해 늘어나는 특성을 보인다”며 “주력제품 분야의 핵심ㆍ원천 기술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을 제공하는 기업들이 점점 고액의 로열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도입에 의한 제품 경쟁력 향상은 효과적인 전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특허정보는 기술개발(R&D)에 전략적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렵사리 기술을 개발했어도 이미 다른 사람이 동일한 기술을 개발, 특허를 등록해 놓았다면 이 기술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실제로 이런 사례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261개 유럽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약 70%의 기업이 R&D 투자 후 해당 기술이 이미 특허권에 의해 보호되고 있음을 안 경험이 있다고 답했을 정도다. 따라서 R&D 투자 이전에 관련 특허권을 조사하는 것은 필수적인 절차라 할 수 있다.시장성이 뛰어난 제품을 기획하는 데도 유용하다. 특허 출원의 트렌드를 살펴보면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더욱이 특허 데이터는 세계적으로 수억건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데다 잘 정리돼 있기 때문에 데이터로서의 활용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특허분쟁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특허청에 심판을 청구한 사건만도 2004년 4,798건에 이른다. 이는 2003년 3,821건에 비해 25.6%나 증가한 수치다. 지난 1분기에도 1,528건의 심판이 청구돼 있어 이대로라면 올해는 6,000건을 넘어설 전망이다. 하지만 특허청에 심사를 청구하지 않은 채 개별적으로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경우도 상당수 있어 실제 분쟁 건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특허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회사 내부에 특허전담팀을 운영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기업들은 물론 중소기업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최근 분쟁이 자주 발생하는 전기전자ㆍ정보통신 분야 기업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난해 말에는 35개의 전기전자 관련 기업 CEO들이 ‘특허 CEO 포럼’을 구성,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등 특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