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인 A사의 K사장은 해외전시회에 제품을 선보이기가 겁난다. 어렵사리 개발한 제품을 자랑하러 갔다가 동티가 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전시회를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후 경고장이 날아왔습니다. 전시회에 출품한 제품이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했으니 로열티를 내라는 내용이었죠. 당연히 이의를 제기했고 다행히 별 소란 없이 마무리됐지만 그후로 전시회 가기가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최근 들어 해외기업과 특허침해 시비에 휘말리는 국내기업들이 늘고 있다. 정부의 집계만으로도 이미 수십건이 진행되고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분쟁을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론에 공개돼 많은 관심을 모았던 LG전자와 마쓰시타와의 PDP 특허분쟁, 삼성SDI와 후지쓰와의 PDP 분쟁, LG전자와 월풀의 분쟁, 삼성전자와 위스콘신대의 분쟁 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마진보다 많은 로열티 요구 빈번“국제적인 경쟁의 룰은 포커와 동일합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합니다. 한국 내의 경쟁이 냉혹하다면 국제경쟁은 잔인합니다. 최근 한국기업에 일본기업들이 특허권 침해를 이유로 법적 소송을 제기하는 것도 한국기업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미국의 법무법인인 맥더모트 윌 앤 에머리의 이인영 국제거래전문 변호사는 해외기업들이 국내기업에 잇달아 특허소송을 제기하는 이유를 글로벌 경쟁의 한 측면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된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견제행위이며 향후 특허분쟁은 더욱 격화될 것이란 전망이다.사실 특허분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내기업 가운데 특허관리와 대응능력이 가장 앞선다고 평가받는 삼성전자의 경우 1980년대부터 특허분쟁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분쟁의 양상은 전에 비해 질적으로 다르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더욱 강력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과거 특허분쟁은 적절한 수준의 로열티를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경쟁사의 시장진입 자체를 막기 위한 분쟁이 잇따르고 있다.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터무니없이 높은 로열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자금여력이 충분치 않은 중소기업의 경우 이렇다 할 대응을 해보지도 못하고 사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특허정보원의 한 관계자는 “제조업의 경우 마진율이 5~10% 내외인데 로열티를 10% 이상 내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협상을 해보지도 못하고 제품생산을 포기하거나 사업 자체를 접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도 동원된다. 협상을 제안하기 전에 소송부터 제기하는 경우가 그렇다. 고소를 당한 기업은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자사의 이미지가 실추될 것을 염려해 수세적인 입장에서 서둘러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의 경우 특허권자의 승소율이 높아 ‘선소송 후협상’의 경향이 많다. 86년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후 로열티 10배 인상을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세관 압류를 통해 분쟁을 유리하게 끌어가는 전략도 자주 활용된다. 이 경우 수출길이 막히는 꼴이어서 피소업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특허권자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특히 일본과 유럽연합(EU)의 경우 특허권을 침해한 제품에 대해 세관 통관을 보류하는 법안을 채택해 정부가 기업의 특허권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 종결된 LG전자와 분쟁 과정에서 마쓰시타도 이 방법을 써 LG전자를 압박했다.피소자를 압박하는 이런 방법은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전혀 다른 기술임에도 자신의 기술을 침해했다며 ‘억지’를 써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에 법적대응의 부작용을 우려해 자신의 독자적인 신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로열티를 지불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후발업체 괴롭히는 ‘강자연합’비슷한 경쟁력을 보유한 기업이나 규모는 차이가 나도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기업들은 협력체를 구성, 다른 기업의 시장진입을 차단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이른바 ‘강자연합’의 전략이다. 몇몇 선두기업들이 ‘특허 카르텔’을 형성해 후발기업의 진입을 저지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HP, 캐논, 엡손 등 5개 기업이 참여한 컬러잉크젯 프린터 ‘카르텔’을 꼽을 수 있다. 이 카르텔이 보유한 특허는 모두 7,000여건으로 이 특허를 모두 피하면서 독자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특허풀(Pool)도 이용된다. 특허풀은 경쟁사들이 상대의 특허를 이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제품을 개발할 수 없는 경우 연합체를 구성, 표준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개발된 기술은 연합체에 속한 기업들만 독점적으로 사용한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동영상 압축기술인 MPEG 기술이 대표적이다. 이미 시장표준으로 자리잡은 이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해당 특허풀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고 특허풀에 참여한 지분에 따라 로열티가 배분된다. 이 기술을 보유한 유럽의 기업들이 MP3플레이어 업체들에 고액의 로열티를 요구하는 통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국내 중소업체들이 적잖은 실정이다.상호특허사용(Cross Licence) 계약을 맺는 기업들도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다. 이 계약은 해당 기업들이 자사가 갖고 있는 특허를 공유하는 것이다. 실력이 비슷한 기업끼리 소모적인 경쟁을 피하는 대신 서로의 특허를 이용해 보다 경쟁력 있는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자는 취지다. 지난해 삼성전자와 소니가 맺은 계약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지난 4월에는 특허분쟁을 벌였던 LG전자와 마쓰시타가 이 계약을 맺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은 기술경쟁력이 높은 기업들끼리 맺을 수 있는 전략”이라며 “그만큼 삼성전자나 LG전자의 경쟁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는 의미”라고 말했다.강자연합은 물론 강자들의 생존방식이다. 이들은 이 방법을 통해 시장에서 더욱 공고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반면 후발업체나 중소기업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해외기업의 특허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자조 섞인 탄식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전자산업진흥회에 따르면 국내 디지털전자 중소벤처기업들이 특허분쟁에 지출하는 비용은 2001년 3억9,200만달러에서 2002년 4억2,600만달러, 2003년 4억8,700만달러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금액은 몇몇 대표기업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추정한 수치여서 실제는 이보다 훨씬 규모가 클 것이라고 협회 관계자는 전했다. 더욱이 중소기업들은 대응능력이 부족해 억울한 경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철우 지식재산권 전문변호사는 “해외특허권자로부터 경고장을 받은 중소기업 의뢰인들은 대부분 권리분석 단계까지만 진행하고 소송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며 “자신에게 권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소송비용이 없어 포기하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전했다.국내에 특허 전문변호사가 부족한 것도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요인이다. 해외의 법무법인을 이용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고 국내 변호사를 선임하자니 마땅한 전문가가 없는 것이다. 최근 들어 특허 전문변호사 지원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최소 3~4년은 지나야 한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특허로 인한 피해와 피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동종업계의 기업들이 공동으로 특허 시비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 말 발족한 ‘특허CEO포럼’이 대표적이다. 최근 전자업계에 대한 일본기업들의 특허 시비가 빈번해진 것이 설립 배경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이 주축이 됐고 이레전자 등 중소기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업계의 한 관계자는 “해외기업의 1차적인 특허분쟁 타깃은 대기업이지만 그 영향은 수천개에 달하는 협력업체들에 미친다”며 “대기업의 선진적인 특허관리 및 대응 노하우를 바탕으로 중소기업들이 공동대응에 나선다면 이전에 비해 훨씬 효과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