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는 이순신 장군의 어록이다. 그리고 ‘미스터 반도체’로 유명한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황사장은 세계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다. 94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256메가 D램을 개발했던 그는 1G D램, 4G D램을 잇달아 선보이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는 평소에도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강조해왔다. 국내기업의 살길을 ‘이순신 리더십’에서 찾은 것이다. 또 삼성전자 반도체의 성공신화에도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수시로 말해왔다. 죽기를 각오하고 연구개발과 시장개척을 한 끝에 오늘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황사장처럼 이순신 리더십을 기업경영에 활용하는 CEO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CEO뿐만 아니라 앞날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직장인들도 이순신 장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이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일궈낸 23전23승의 신화에 매료됐을 뿐만 아니라 온갖 핍박과 모함을 이겨내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에 깊이 감동하고 있다.리더십 다룬 서적 봇물출판계는 이순신 전성시대나 다름없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불던 바람이 열풍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신간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소설, 평전, 경영서에서 아동도서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교보문고에서 파는 이순신 장군 관련 책이 무려 180종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에 출간된 책만 70여종에 이른다.불씨는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와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황금가지) 등 소설에서 피어올랐다. <칼의 노래>는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만 2만7,000여권이 팔렸다. 점차 거세진 불길이 만화 같은 아동물로 이어지더니 최근에는 경영서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경영서의 상당수는 리더십을 다룬 책이다.지용희 서강대 국제경영학과 교수가 쓴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디자인하우스)가 대표적이다. 지교수는 이 책에서 작은 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업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12척의 배로 200여척의 배를 물리친 ‘명량해전’이야말로 우리나라 기업들이 배워야 할교과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경영서로는 드물게 3만여권이 팔렸다.<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윤영수 지음·웅진닷컴)는 사례연구를 주로 했다. 임진왜란 7년간 올린 23전23승의 신화 중 17개를 골라 이순신의 리더십과 용병술을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불패의 신화를 남긴 이순신의 전투철학을 어떻게 현대에 적용할지 고민했다.<부활하는 이순신>(황원갑 지음·이코비즈니스)은 언론인 출신의 작가가 충무공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춰 쓴 평전. 저자는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이순신이 탁월한 군사 CEO였다고 평가한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긴다’는 지휘철학에서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을 배우라고 강조한다.<내게는 아직 배가 열두척이 있습니다>(김종대 지음·지평)는 시대를 고뇌하는 인간적인 장수이자, 칼날 같은 현실인식을 토대로 정세를 분석하는 이순신을 그린 책.이외에도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김덕수 지음·밀리언하우스), <이순신 인간경영노하우에서 배운다>(강은희·삼각형프레스) 등이 이순신의 리더십을 다룬 책이다. 이중 여러 종이 1만~3만권씩 팔리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기업들도 이순신 리더십 배우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순신리더십연구회 소장도 맡고 있는 지교수는 요즘 기업체들의 강의 요청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순신 리더십’ 강의만 100여차례 했을 정도다.지교수의 저서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를 낸 디자인하우스는 기업들의 대량구매에 신이 났다. 삼성화재, 태평양, 효성, 진로, 에스콰이아, 한국가스공사, 소니코리아, 이메이션코리아 등이 책을 사간 업체들이다.CEO들의 관심도 폭발적이다. 황창규 사장과 더불어 서경배 태평양 사장도 이순신 장군의 열렬한 팬이다.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을 실제 경영에 써먹고 있는 것이다. 관련 도서를 팀장급 이상 임직원에게 직접 선물했는가 하면 월례조회 때는 책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아울러 직원들을 대상으로 리더십 강연회를 마련하는 등 이순신 리더십 전파에 뜨거운 열정을 보이고 있다.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도 이에 못지않다. 문사장은 “비전과 통찰력, 끈기, 설득력, 희생정신 등 이순신 장군은 리더십의 화신”이라며 “그에 비하면 기업경영은 훨씬 쉽다”고 털어놓는다.지교수가 운영하는 리더십연구회에는 60여명의 회원이 매달 한번씩 모인다. 회원으로는 김승유 하나은행 회장, 송자 대교 회장, 장흥순 벤처기업협회 회장 등 쟁쟁한 최고경영자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다.중소기업의 경영자들도 이순신 장군 리더십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지난 4월 ‘이순신과 벤처기업 경영자의 리더십’으로 열린 벤처기업협회의 포럼에는 80여명의 CEO가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벤처CEO 포럼을 담담하고 있는 벤처기업협회 박소영씨는 “어려운 조건에서 성공한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비슷한 사정의 벤처기업 CEO들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드라마도 열풍 확산 가세이순신 장군의 리더십 열풍이 이처럼 강력하게 부는 이유는 뭘까. 출판업계에서는 열풍의 진원지로 청와대를 꼽는다. 노대통령이 지난해 탄핵정국 때 몇차례 <칼의 노래>를 언급, 불씨를 피웠다는 것. 기존의 영웅일대기가 아니라 고뇌하고 갈등하는 캐릭터가 직장인들에게 크게 어필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여기다가 KBS1TV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시청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온 나라가 이순신열풍에 휩싸였다는 것이다.김학원 휴머니스트 사장은 “출판, 정치, 만화, 방송, 비즈니스 등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예상보다 강력한 열풍이 불고 있다”고 말했다.김수희 디자인하우스 편집장은 “이순신장군을 CEO로 바라보는 시각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23전 23승의 리더십비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진단했다.열풍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필자들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평범한 직장인, 학원강사, 현직 판사, 해군대령 등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적잖게 집필에 참여한 것이다. <이순신의 두 얼굴>(창해)의 저자인 김태훈씨(41)는 은행연합회 신용정보관리팀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신용정보관리팀은 매월 신용불량자 통계를 작성, 발표하는 은행연합회 핵심부서 중 하나다. 이런 바쁜 업무 중에도 3년여 작업 끝에 680여쪽의 역사서를 발간했다.김씨는 “이순신 장군은 하늘에서 내린 영웅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의 길을 밟아 ‘평범’에서 ‘비범’으로 간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고 집필동기를 밝혔다. 그는 “우리도 작은 원칙이라도 세워 잊지 말고 노력하면 리틀 이순신이 될 수 있다”며 “실천하는 리더십으로 이순신 장군을 봐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 이순신과 임진왜란>(비봉출판사)도 이순신 연구동아리인 이순신역사연구회 회원들이 25년간에 걸쳐 펴낸 책이다. 연구회 회원들은 기업 교육 강사, 기업 홍보마케팅 실무자, 교사, 학원강사 등 현업에 종사하는 일반인들이다.연구회 회장인 정광수씨는 재직하던 한 보험회사에서 동료들과 80년 이순신 연구 동아리를 만든 게 계기가 돼 직장을 그만두고 연구에 매달린 인물. 정씨는 “충무공을 연구하면서 우리의 모습 속에도 이순신과 같은 모습이 있다는 점을 느꼈다”며 “닮은 점들을 찾아내고 계발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외에도 <나에겐 아직 배가 12척이 있습니다>의 저자 김종대씨는 주로 부산ㆍ경남지역에서 법관생활을 해온 현직 판사다.이처럼 다양한 직업군에서 필자가 나온다는 점에서 이순신 장군 리더십 열풍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물론 반대시각도 적지 않다. 박종홍 이코북 사장은 “수많은 관련서적이 쏟아지고 있지만 대다수가 아동물로 실제 리더십 관련서적의 판매부수는 많지 않다”며 드라마가 종영되면 열기가 식을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기존에는 주로 위정자들이 이순신 장군을 불러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주로 충성이데올로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복원된 이순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이순신’이다. 고뇌와 갈등이 중심이다. 그리고 역경을 이겨낸 평범한 사람들의 영웅이다.일각에서는 ‘복원된 이순신에게 철학과 이념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최악의 조건을 최적으로 만드는 그의 리더십은 개인의 삶이나 기업경영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뿌리내릴 것으로 보인다.돋보기 지용희 교수가 말하는 ‘이순신 리더십’경제전쟁시대 ‘리더의 표상’이순신 리더십의 최고전문가는 지용희 서강대학교 경영대 교수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기업에 이순신 리더십 강의를 다녔다. 7년 전에는 <중앙일보>에 10회에 걸쳐 이순신 리더십에 대한 칼럼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교수가 이순신 리더십 전파에 적극 나선 이유에 대해 “경제전쟁시대의 전략가인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은 현실에서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군사전쟁이든 경제전쟁이든 원리는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순신 장군은 CEO입니다. 장군이면서 지방자치단체장이자 최고경영자였습니다. 장군은 7년간 일기를 썼습니다. 그 기록정신은 요즘 같은 지식정보화 시대에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군은 영원히 새로운 리더의 표상으로 자리잡을 겁니다.” 지교수는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 포인트로 5가지를 꼽았다.1. 공정성: 이순신 장군은 원칙주의자다. 투명경영, 윤리경영, 정도경영의 실천자다. 첨령결백은 23전23승의 근거다. 한 예로 상사가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 앞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명령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기에 따르지 않았다.2. 기록정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에 난중일기를 썼다. 이는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 기록은 국가와 후손의 재산이다. 또 기록은 일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3. 혁신: 혁신은 요즘 기업들의 화두나 다름없다. 혁신 없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법이다. 거북선은 혁신의 상징이다. 적은 여기서 뒤졌고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4. 새로운 진법: 한산대첩을 이끈 학익진은 새로운 진법이자 새로운 경영방법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진법을 성공시키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5. 인재육성: 상과 벌을 확실히 했다. 종들에게도 상을 주고, 개를 잡은 군사는 80대의 곤장을 쳤다. 그리고 각자의 특장점에 따라 임무를 주고 대했다. 조직의 시너지를 극대화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