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란 평생 노력하고 희생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정신적인 희생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면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김종진 LG화재 강남지점 대청영업소 설계사(84)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1984년부터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팔순을 넘겼어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 4월 중순에는 LG화재에서 공로상도 받았다. 20년 이상 근속에 실적도 좋았다. 지금은 다소 줄었지만 2002년까지만 해도 월수입이 1,000만원대에 육박했다. 종교활동에도 열심이다.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교회에 기부한다. 그의 활동량만으로는 여느 젊은이가 부럽지 않은 셈이다.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젊은 아버지’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김씨는 평생을 철도청 공무원으로 살았다. 그는 이 당시를 “세상물정 모르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역장으로 정년퇴직한 김씨는 일시불로 받은 연금 5,000만원으로 새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이 돈을 지인과 동업하는 과정에서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두 잃고 말았다.“공무원 생활만 해 사람을 잘 믿었습니다. 차용증도 없이 함부로 빌려주곤 했습니다.”이후 빚까지 지며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다는 김씨는 우연히 발견한 신문광고에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어떤 종류의 일인지는 몰랐지만 ‘공무원 출신 우대’라는 문구 하나만 보고 찾아갔습니다. 그 일이 보험 관련 업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보험=사기’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그래도 기왕 시작한 일, 부자동네에서 새로운 고객을 개척해 보겠다고 고급주택 밀집지역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초인종을 눌러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어쩌다 벨을 누르는 데까지 성공하더라도 보험이라는 말을 꺼내면 이내 가정부의 면박만 돌아왔다. 그래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노력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가족을 생각하면 어떤 힘든 일도 다 견딜 수 있었다. 결국 빚도 다 갚고 지금은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고. 의과대학 교수인 맏아들은 늘 “일하지 말고 쉬라”고 이야기하지만 김씨는 명절 때마다 자식과 손자, 손녀에게 용돈을 줄 수 있는 자신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더욱이 이는 곧 자신이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일해 얻은 결과여서 산교육이 되는 것도 뿌듯하다.죽을 때까지 일하다 건강하게 죽는 게 꿈이라는 김씨는 이 시대 아버지로서 젊은이에게도 할말이 많다.“지금 세상이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많겠지만 희망을 향해 매진하면 끝은 보이게 마련입니다. 또 노후는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아빠의 청춘 - 강홍석‘옛일보다 새 각오가 소중합니다’“시집간 딸이 ‘멋쟁이 아빠’로 보여야 한다며 옷을 선물하곤 합니다. 아내와 딸이 저의 전속 코디네이터인 셈이죠.” 모토로라코리아에서 30년간 일했던 강홍석씨(65)는 지난해 10월 변신을 꾀했다. 조경사업 1인 회사를 시작한 것.그는 1969년 모토로라코리아에 입사해 96년 제조부장으로 퇴직한 뒤에도 한동안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99년 지인들이 컨설팅회사를 만들 당시에는 이사로 참여했다. 그후 3년간은 아웃플레이스먼트(퇴직자 전직지원) 업무를 하며 퇴직자들을 교육했다.“아웃플레이스먼트 교육을 하다 보니 ‘창업은 연습이 아니다’는 교훈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경험 없이 시작하는 사업은 실패의 지름길입니다.”60대 실버도 신체적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선 그는 ‘조경사업’에 눈을 돌렸다. 아파트 단지 등에 꽃이나 나무를 심어주며 여유롭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조경업무에는 정해진 퇴직연령이 없다는 것도 눈에 띄었다. “주차장 관리와 경비는 대부분 65세까지만 할 수 있더군요. 반면 조경은 대인관계만 원만히 유지하면 신체가 허락하는 날까지 가능합니다. 조경업무로는 큰돈은 벌 수 없지만 용돈 정도는 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조경업무를 통해 시간관리와 건강유지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였다.조경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그는 경험을 쌓기 위해 농장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다. 결국 서울 방이동에 위치한 한 농장에서 2년간 일꾼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의 80%밖에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수많은 나무와 꽃의 품종을 가려낼 줄 알게 됐고 나무를 심고 나르는 일도 모두 익혀갔습니다.” 2년간의 훈련을 끝내고 조경사업을 시작하며 옷차림에도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고객을 유치하고 한번 맺은 고객과의 계약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깔끔하게 보이려 노력한다. 고객들은 염색한 머리와 젊은 옷차림의 강씨를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본다. 아파트 조경사업을 따내려면 아파트 관리소장과 동대표, 부녀회장과의 유대관계가 중요하다. 농장에서 일할 당시 맺은 아파트 200여개 단지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는 고객관리를 위해 안부전화도 자주 한다.은퇴한 실버에게 그는 한마디 조언을 던졌다. “예전 현직시절 고위직에 있었더라도 그 당시의 마음상태를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해요. 또 제2인생을 시작하기 전에는 관련분야에서 2~3년간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강씨는 “땅과 나무, 꽃을 벗 삼아 자연친화적으로 살아가겠다”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아빠의 청춘 - 이정필‘고민말고 즐겁게 삽시다’이정필씨(74)를 만난 날 기자는 “왜 이리 늦게 왔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이발봉사를 가려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야 하는데 기자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됐다는 것이다. 그는 일주일에 두 차례 이발봉사를 다닌다. 기자를 만난 날은 의정부에 가려던 참이었다. 그가 사는 분당에서 의정부까지는 전철만 6번을 갈아타야 하는 먼 거리.지난해까지 월급쟁이 생활을 한 이씨는 지금은 공식적으로 일을 그만둔 상태다. 하지만 특별한 소속이 없는 요즘도 이씨의 스케줄은 여전히 빡빡하다. 9년째 하는 이발봉사에다 여가시간에는 지역사회 게이트볼 선수로도 활동한다. 평생 이발기술로 가족을 책임져 온 이씨는 10년 전에 이미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봉사활동을 통해 ‘가위손’을 녹슬지 않게 관리해 온 셈이다.봉사할동 때 항상 지니고 다닌다며 그가 꺼내 보인 이발사 면허증에는 ‘1962’라는 숫자가 누렇게 바랜 종이에 또렷하게 새겨 있었다. 그가 50년에 면허를 딴 뒤 한번 분실해 새로 발급받은 ‘1962년산’ 꾸깃꾸깃한 면허증에 ‘아빠의 청춘’이 들어있었던 것. “면허증을 들고 가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게 그가 이 낡은 면허증을 몸에 지니는 이유다. 부모 없이 자란 이씨는 ‘나 한 사람 굶어 죽기야 하겠나’ 하는 심정으로 이발소에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면허시험에 합격해 ‘이제 먹고 살수는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노인정 등 복지시설에서 이발봉사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술대접을 자주 받는다.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술을 함께하며 노래도 한 소절씩 하다 보면 어느새 친구가 돼 버린다. 이렇게 쌓인 노래실력으로 TV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도 있다.이씨는 돈이 없다고 고심하면 인생이 황폐해진다고 믿는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가 이발소를 그만둔 뒤 봉사를 다니는 것도 삶에 대한 이 같은 적극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파트 단지에 직접 광고전단을 뿌려 자신을 알린 데서 이발봉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그는 아버지의 권위라는 것에 대해서도 무척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행복이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게 그가 삶을 바라보는 기본 태도다. 따라서 아버지의 권위도 내가 행복하고 자녀가 건강하면 저절로 따라온다는 얘기다.“왜 나이 들어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이 일로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는 게 또 하나의 기쁨이다. 누구와 만나도 대화만은 자신 있다는 이씨는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해도 배울 점은 있다”고 힘줘 말했다.이처럼 낙관적으로 사는 70대의 ‘젊은 아버지’ 이정필씨는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잔소리도 딱 한가지다. 지금의 10분의 1만 검소하게 살라는 것. 그러면 곧 좋은 시대가 열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검소하게 살면 좌절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selfzone@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