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형태(Form)와 기능(Function) 사이의 역학관계에 따라서 그 정의가 조금씩 변해왔으나 근본적으로 심미성과 사용성을 기본으로 경제성을 고려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3D(Digital, DNA, Design)의 하나로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디자인을 다음과 같이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국제적 트렌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우선 디자인은 기능을 가진 형태의 구현에서 벗어나 ‘(인간의) 문제해결’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또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선입견에 의한 문제의 이해는 대부분 불완전한 해결책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미국 IDEO사에서 개발한 새로운 쇼핑카트(Shopping Cart)는 기존 쇼핑카트의 근본적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IDEO는 쇼핑카트의 기본 기능인 바스켓(Basket) 기능을 보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앰으로써 도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디자인은 인터페이스(Interface = inter + face)이다. 즉 회사와 고객 또는 기술과 사용자 사이의 접면(接面)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표현으로 회사와 고객 사이를 제대로 이어주고 새로운 기술에 의한 결과물(디지털 제품)을 사용자와 잘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라는 뜻이다. 디지털 컨버전스(Convergence)에 따라서 새롭게 등장하는 다기능 디지털 제품이 사용자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사용 행태 및 인지적 특성까지 고려한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디자인은 (좋은) 경험의 제공자이다. 경험 마케팅의 전문가인 슈미트(Schmitt)는 경험이란 ‘고객과 제품, 회사 또는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고객의 반응(Reaction)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상호작용의 결과에 따라서 고객에게는 어떤 느낌(Feeling), 즉 감정(Emotion)이 생기게 된다. 이 감정은 즐거움과 행복 같은 긍정적 감정과 두려움과 충격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 나누어진다. 즉 경험에 따라서 좋은 감정 또는 나쁜 감정을 갖게 되고, 이 감정의 결과에 따라서 그 제품 또는 회사에 대한 우호적 또는 비우호적 인상이 결정되게 된다. 따라서 디자인은 고객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현재 한국디자인의 현황은 외관상으로는 ‘디자인경영’의 활성화에 따른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과 경영의 결합에 따른 합리적 프로세스에 의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의 개발이 가능해지는 등 많은 시너지(Synergy)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휴대전화, LCD 모니터, MP3플레이어, 냉장고, 에어컨, 헬멧, 자동차 등의 디자인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디자인상을 수상하는 등 우리의 자랑거리가 됐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디자인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주요 문제점을 갖고 있다.우선 ‘디자인 리서치(Design Research)의 부재’를 들 수 있다. 문제해결을 위한 선행조건이 문제의 이해라고 한다면 문제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디자인 리서치이다. 단순한 마케팅 조사가 아닌 사용자의 자연스러운 행태에 대한, 나아가 인지적 특성에 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리서치가 필요하다. 이를 토대로 문제해결을 위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 다른 문제는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로 하는 리서치가 아닌 직접 ‘현장’으로 나가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는 것이다.진정한 사용자 중심 디자인(UCDㆍUser-Centered Design)의 이해부족도 문제다. 미국에서 1980년대에 시작한 ‘사용자 중심 디자인’ 철학의 핵심은 디자인 전체 과정을 통해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테스트와 평가에 있다. 과거에는 통상적으로 제품이 출시되기 직전에 사용자 또는 시장 테스트를 한번 실시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는 제품 또는 서비스의 개발 초기부터 사용자를 포함시켜 디자이너의 관점이 아닌 실제 사용자의 관점에서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서 개선된 제품만이 출시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디자인은 사용자 중심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표방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스타 디자이너의 부재도 되새겨볼 만하다. 국내 디자인계의 숙원은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간판 스타급 디자이너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필립 스탁(Philippe Starck), 독일의 디터 램스(Dieter Rams), 이탈리아의 에토르 솥사스(Ettore Sottsass), 미국의 헨리 드라이퍼스(Henry Dreyfuss) 같은 대표적 스타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이들은 자국의 디자인 수준을 평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근 정부 및 KIDP에서 이를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를 위한 합리적 체계가 필요하다.국내 디자인 전문회사의 국제경쟁력 부족도 아쉽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000개 이상의 디자인 전문회사가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아이디오(IDEO), 디자인 컨티뉴엄(Design Continuum), 인바이로셀(Envirosell), 이탈리아의 알레시(Alessi) 등은 명실공히 세계적인 디자인 또는 리서치회사이다. 이들 회사가 자국의 디자인 수준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보다 더 많은 디자인전문회사가 있으나 대부분 제품디자인, 시각디자인, 웹디자인 분야의 일을 하고 있으며, 미국의 소닉 림(Sonic Rim)같이 새로운 리서치 기법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전문회사는 없다. 극히 제한된 분야에 너무 많은 전문회사가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이와 같은 한국디자인의 문제점을 한번에 해결하기 위한 묘책은 없으나 체계적 접근을 통해 달성이 가능한 효과적인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우선 통합디자인(Integrated Design)이 정착돼야 한다. 디자인을 중심으로 공학과 마케팅이 통합된 시스템의 구축 및 활용이다. 형식이 아닌 실질적 통합디자인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분야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바탕이 돼야 한다. 현재 몇몇 대기업들은 이를 위한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나 이는 단순히 몇 차례의 사내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CEO부터 모범을 보여야 가능할지도 모르는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 IDEO사의 경우 디자인, 공학, 마케팅, 심리학, 언어학 등 다양한 전공을 가진 디자이너들을 한 팀으로 구성해 제품 기획단계부터 함께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성공적인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디자인 교육 시스템도 개선돼야 한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미국보다도 더 많은 3만6,000명의 디자인 전공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들은 거의 동일한 교과과정에 의한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다. 단순히 실기 중심의 교육을 통해서는 결코 경쟁력 있는 디자이너가 배출될 수 없다. 세계적 명문인 미국의 스탠퍼드대학과 같이 학부에서부터 철저한 통합적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공학, 기계 및 제조공학, 마케팅,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등에 대한 폭넓은 상호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통합디자인도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마지막으로 ‘팀 스피리트’(Team Spirit) 정신이 필요하다. 한미연합사의 공동작전 이름이 ‘팀 스피리트’였다. 언어의 장벽이 있는 한미연합군이 성공적으로 작전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협동이 아닌 ‘협동정신’이 필요함을 강조한 명칭일 것이다. 한국디자인이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팀 스피리트’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정연한 논리도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팀을 위해서 한번 같이해 보자’며 의기투합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정신이 더욱 필요하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고집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더 좋은 아이디어를 활용해 최선의 결과를 모색하는 오픈마인드가 ‘팀 스피리트’의 선결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