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바로 서야 기업존속ㆍ발전 가능… 언제든 분열ㆍ통합하는 아메바경영이 핵심

‘이나모리즘은 불멸인가’(稻盛イズムは不滅か) 일본의 대표적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지니스> 9월27일자 커버스토리 타이틀이다. ‘이나모리즘’이란 일본 교세라그룹 명예회장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ㆍ72)의 이름을 딴 경영철학을 뜻한다.그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도덕경영ㆍ정도경영을 강조하는 일본 벤처업계의 선구자로 한국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교세라는 장기복합불황에도 불구, 끊임없이 성장을 꾀하는 알짜배기 그룹이다. 때문에 ‘이나모리즘’은 불확실한 경영환경을 극복하는 중요한 키포인트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교세라 설립 45주년을 맞아 최근 일본 열도에선 ‘교세라 배우기’가 한창이다. 재계는 물론 정·학계도 불황타개의 핵심비결로 ‘이나모리즘’을 첫손에 꼽는다. 교세라의 특별한 성공신화에서 한국의 CEO가 배울 점을 살펴본다.자본금 1,157억엔에 매출액 1조1,408억엔, 세전이익 1,000억엔…. 교세라의 2003년 재무제표(정보통신 계열사인 KDDI 실적은 제외)를 요약한 주요 수치다. 159개 자회사에 약 5만7,870명의 종업원이 근무 중이다. 사실 이 정도 덩치를 가진 회사는 어디에서건 드물지 않다. 일본은 물론 한국기업 중 몇몇은 교세라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하지만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 외형보다 내실이 튼실해야 롱런할 수 있다. 교세라가 주목받는 건 이 때문이다. 지난해 교세라의 수익 기준을 웃도는 일본 제조업체는 19개사에 불과하다. 특히 교세라의 영업이익률(10.1%)을 능가한 곳은 4개사뿐이다.교세라는 올해로 창립 45주년을 맞는다. 그간의 성장세는 놀라운 상승곡선을 그렸다. 59년 남의 회사 창고를 빌려 시작한 ‘교토세라믹’은 현재 주력제품(세라믹)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세계시장의 70%가 교세라 제품이다. 45년 전 자본금 300만엔, 매출 2,600만엔, 종업원 28명의 평범한 벤처기업이 지금은 세계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막강파워로 성장한 셈이다. 교세라의 연평균 이익률은 20% 전후를 기록하고 있다. 매출액은 연평균 27%씩 증가했다. 특히 69년에는 42%의 경이로운 수익률을 달성했다. 96년에는 소니를 제치고 일본 국내기업 중 수익률 1위로 부상하기도 했다. 버블붕괴로 대형 도산이 잇따르던 97년에도 13.4%의 매출액 경상이익률을 확보했을 만큼 탄탄한 재무구조를 지닌 근육질 회사로 유명하다.종합정보통신그룹으로 분류되는 교세라의 활동영역은 광범위하다. 세라믹을 비롯, 휴대전화, 디지털카메라에 이르기까지 전자ㆍ통신부문을 총망라한다. 다만 주력은 세라믹의 교세라와 정보통신의 KDDI로 양분된다. 전신은 공업용 도자기(파인세라믹)를 생산ㆍ판매하던 교토세라믹이다. 경쟁사에 비해 출발은 늦었지만 성과는 빨랐다. IC패키지에 최초로 파인세라믹을 활용하면서 반도체산업과 더불어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했다. 시간이 갈수록 경쟁업체와의 격차도 벌어졌다. 창사 이래 단 한 번의 적자도 없을 만큼 최고의 이익률을 유지했다.그룹의 또 다른 축은 KDDI로 요약되는 정보통신부문이다. 다각화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84년 정보통신사업의 자유화 조치에 따라 NTT에 도전하기 위해 세운 DDI(第2電電)가 본류다. DDI는 시외, 자동차, 휴대전화 등의 소프트웨어를 담당한다. 하드웨어는 모회사인 교세라가 맡는다. 초기 DDI 설립과 통신사업 진출은 돈키호테가 풍차를 상대하는 것처럼 묘사돼 일본 재계에서도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나모리 회장은 결국 공격적ㆍ창의적 방법으로 오해를 날려버렸다. 2000년 DDI를 포함한 4대 민간통신업체를 합병해 랭킹 2위의 종합전기통신회사인 KDDI를 낳았다. 시장점유율은 NTT에 이어 2위다. KDDI까지 포함하면 그룹의 총매출은 4조엔을 훌쩍 넘는다.교세라의 성공신화는 ‘이나모리즘’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나모리즘’이란 뭘까. 창업주인 이나모리 회장의 “나는 철학이 있어 성공했다”는 말처럼 이나모리즘은 일종의 경영철학이다. 확고한 기업이념과 철학, 그리고 미래를 읽는 능력과 결단력이 오늘의 교세라를 만들었다는 평가다. 교세라의 철학에는 일과 사람, 조직, 리더십, 경영, 성공의 본질ㆍ의미가 비교적 명확하다. 특히 리더의 뚜렷한 성격규정이 중요하다. 이나모리 회장은 “기업의 흥망성쇠는 결국 기업가의 사람됨에 달렸다”며 “이윤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바른 길을 걷겠다는 신념과 철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가란 경마장의 말처럼 자신을 믿고 마권(주식)을 산 사람(주주)을 위해 죽어라 달려야 한다고 본다. 한때 “철학 없는 사람은 물러가라”며 비판한 적도 있다.이나모리 회장은 CEO가 가져야 할 경영원칙으로 ‘열정’(PASSION)을 제시했다. 열정이 결국 잠재력 발휘를 가능하게 한다는 경험에서다. 여기서 열정은 또 7가지 머리글자로 나뉜다. 이익(P), 야망(A), 진실(S), 용기(S), 혁신(I), 낙관(O), 인내(N) 등이다. 판매극대, 비용극소화로 이익을 실현하고, 잠재력이 발휘될 만큼 야망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을 배려해야 둘 다 승리하며 비겁한 태도는 절대금물이다. 밝은 내일을 위해서는 창의력을 지니고 희망과 꿈을 가질 것을 권한다. 무엇보다 꾸준히 일하는 게 교세라 경영철학의 요지다. 성공이란 ‘능력×노력×태도’의 함수며, 우선순위는 태도ㆍ노력ㆍ능력이라는 내용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 결정적인 성공변수도 없다는 얘기다.이 내용은 <교세라 철학(Philosophy)>이라는 책으로 엮여졌다. 이나모리 경영철학의 전도사로 알려진 이토 겐스케(伊藤謙介) 교세라 회장이 사장시절 공들여 만들었다. 그는 “교세라 철학이 희박해질 때 회사의 운명은 다한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이나모리 회장 자신도 사후를 걱정해 평소 임직원에게 ‘이나모리즘의 철저한 전승’을 유언처럼 강조했다. 이를 위해 ‘이나모리식 12대 경영항목’을 선정, 전직원에게 교육하고 있다. 이토 회장은 기업의 안정과 혁신의 양립을 ‘팽이이론’으로 설명한다. 구심력과 원심력을 적절히 섞어 시대변화에 대응하자는 논리다. 팽이를 계속 돌게 하려면 원심력(다각화ㆍ혁신)이 필요하며, 쓰러뜨리려는 외부환경 변화는 구심력(교세라 철학 계승)으로 제어하자는 뜻이다. 이는 목표와 비전의 명확한 좌표축을 선정한 후 다각화를 통해 ‘선택과 확대’를 추진해 왔던 교세라의 성장사와 맥을 같이한다.교세라는 사실 다각화 경영으로 성장을 반복해 왔다. 일각에서는 인수ㆍ합병(M&A)이라는 변칙적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비난하지만 “도의에 따라 회사를 떠맡았을 뿐 결코 사냥꾼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나모리 회장의 말처럼 무리수는 거의 목격되지 않는다. 실제로 적자기업을 M&A해 흑자로 바꾼 뒤 자사 사업부문과의 상승효과를 유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나같이 앞날이 불확실한 부실기업이었지만 교세라 경영철학의 접목을 통해 튼실한 기업으로 변신시켰다. 가령 M&A 후 인원삭감 없는 고용보장을 통해 조직원의 역량 발휘를 이끌어냈다. 반면 ‘적자는 죄악’, ‘가격결정이 경영’이라는 교세라식 경영방침으로 흑자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이때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아메바경영’이다.‘아메바경영’은 교세라의 성장신화를 논할 때 양념처럼 등장하는 말이다. 핵심경쟁력이자 교세라 경영철학의 전부라는 연구보고서도 많다. 이타와 공생을 실현하는 행동부대로 사훈인 ‘경천애인’을 완성하는 조직체계다. 99년 사장으로 취임한 니시구치 야스오(西口泰夫) 교세라 사장은 “당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한 결과 항상 성장할 수 있었다”며 “그 DNA(유전자)를 계승해 나가는 게 나의 임무”라고 밝혔다. 여기서 DNA는 바로 이나모리즘을 현실에 적용하는 ‘아메바’조직을 뜻한다. ‘아메바경영’은 많은 대학에서 창조형 기업의 대표사례로 연구되고 있다.아메바는 단세포동물이다. 암수가 섞이지 않은 채 혼자서 무성생식을 하기 때문이다. 모세포와 세포분열 결과 낳은 딸세포의 염색체도 유전적으로 똑같다. 손오공이 털을 뽑아 한번 불면 수백 마리가 복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연체동물처럼 필요에 따라 분리ㆍ합체된다. 기업의 성장(Fat)은 불가피하게 유연성(Flexibility)과 신속성(Fastness)을 저하시킨다. 이른바 ‘3F의 딜레마’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이 열쇠를 아메바에게서 찾았다. 제아무리 거대기업이라도 아메바처럼만 움직인다면 3F의 달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교세라의 실험은 성공했다. 큰 덩치에 걸맞지 않은 유연ㆍ신속한 조직시스템인 ‘아메바경영’은 일본이 낳은 가장 유명한 경영이론으로 평가받는다.아메바경영은 소집단ㆍ부문채산제로 요약된다. 말단조직의 신축성을 최대한 보장하자는 취지다. 구성원 개개인의 강력한 열정을 살리기 위해 조직형태는 비정형적이다. 아메바조직의 인원수는 3~4명에서 많게는 40~50명에 이른다. 평균 7~8명이다. “시점ㆍ상황에 따라 최적의 조직으로 분할ㆍ통합돼야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이나모리 회장의 분석처럼 교세라의 아메바조직은 수시로 세포분열을 한다. 조직을 둘러싼 고정ㆍ파괴가 일상적인 셈이다.제조업이라면 각 공정별로, 영업은 지역ㆍ상품별로 아메바조직이 꾸려진다. 이익관리는 독립채산에 따라 각 아메바의 리더가 챙긴다. 이때 리더는 흑자를 위한 자발적인 수익창출 유인효과에 직면한다. 결국 교세라는 수천개의 아메바가 합쳐진 조직이다. 아메바조직은 매월 매출ㆍ경비를 조사해 채산표를 만든다. 그 차이가 이익이다. 이익을 노동시간으로 나눈 ‘시간당 채산성’이 세포분열의 근거로 작용한다. 때문에 아메바조직을 ‘Profit Center’라고도 한다.아메바조직은 철저히 일ㆍ적성ㆍ효율ㆍ전체효과 중심으로 운영된다. 운영목적은 다양하다. 먼저 전원참가의 경영을 실현한다. 아메바조직은 지혜의 원천을 멤버로 보고 모든 이에게 CEO가 될 동기부여를 한다. 또한 공헌도는 채산으로만 측정된다. 아메바의 조직목표는 시간당 채산에 근거한 부가가치 창출뿐이다. 아메바끼리는 거래ㆍ협력관계인 동시에 라이벌이다. 경쟁유발을 위해 채산을 나타낸 그래프가 작업현장 곳곳에 붙어 있다. 투명경영의 실현도 가능하다. 조직을 세분화하면 회사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다. 좀 복잡해진다 싶으면 바로 세포분열이다. 이때 각 아메바의 매출ㆍ경비ㆍ시간집계는 더 정확히 파악돼 의사결정은 한결 신속해진다. 교세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상하 조화로운 건 이 때문이다. 리더육성 역시 효율적이다. 사장의식을 갖고 대기업병을 최소화할 수 있어서다.아메바경영은 지금도 진화를 거듭한다. 제조업 외에 유통ㆍ서비스업체 등에 벤치마킹돼 급속도로 확산 중이다. 업태와 규모를 넘는 인기절정의 기업모델로도 자주 소개된다. 어떤 환경변화에도 대처가 가능하도록 자율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점 때문이다. 물론 업종ㆍ시대ㆍ규모에 따라 수정 적용되지만 교세라의 보편적인 경영철학은 변함이 없다. 현재 아메바경영을 도입한 회사는 300개사가 넘는다. 유니참 등 굵직한 회사도 많다. 이나모리즘을 설파하는 자발적 공부모임인 ‘세이와주쿠’(盛和塾)의 회원만 3,500명을 웃돈다. 여기에는 상장사 100여 곳의 간부도 포함된다. 아메바경영의 습득은 실제로도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45주년을 맞아 최근 교세라는 새로운 성장목표를 제시했다. ‘포스트 이나모리 시대’에도 진화를 반복하기 위해서다. 지난 5월24일 400여명의 그룹 간부가 모인 가운데 니시구치 사장은 “매출액 2조엔에 세전이익률 20%를 달성할 것”을 제시했다. 이동통신기기사업만 놓고 보면 현재(약 3,000억엔)의 두 배에 달하는 목표치다. 임원들이 놀란 건 당연지사다. 예측불가능을 이유로 단기목표만 내놓던 그간의 관행과도 배치되는 발언이었다. 이는 84년 이나모리 회장이 “1조엔을 목표로 하자”고 밑그림을 그린 이후 20년 만의 일이다. 게다가 3년 전 IT버블 붕괴로 이익이 전년보다 무려 7분의 1(554조엔)로 급감했던 기억도 뚜렷하다. 그간의 불문율이었던 ‘최저수익률 15%’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이날의 장기플랜은 교세라의 새로운 도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전망이다.돋보기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 걸어온 길윤리경영으로 존경 한몸에… 우장춘 박사 사위그의 청춘은 수많은 우여곡절로 점철돼 있다. 되레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게 더 타당하다.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결핵을 앓았으며, 전쟁으로 삶을 움켜쥘 희망조차 없었다. 집은 가난했다. 6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모두 한가하게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다. 취직도 뜻대로 안됐다.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나는 어떤 것을 해도 잘되지 않는다는 자학에 시달렸다. 그때 엉뚱한 선택을 했다면 내 인생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그래도 길은 있었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초자회사인 쇼후공업에 입사하게 된다. 그때가 1955년. 그의 첫 직장은 일본에서 최초로 고압초자를 만든, 한때는 우량회사였다. 하지만 젊은 이나모리에게 직장운은 그게 다였다. 이미 법정관리나 다름없을 만큼 경영상태가 악화됐다. 직장동료는 떠나갔고, 월급도 밀리기 시작했다. 의지할 데라곤 연구실뿐이었다.외롭고 고독했지만 업무에 재미를 붙여갔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TV 수요가 늘면서 그의 연구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입사 2년 후 결국 개발팀의 지휘를 맡게 됐다. 쇼후의 세라믹 수요는 납기를 대기 힘들 만큼 급증했다. 그런데 문제는 또 터졌다. 회사가 대규모 춘투에 휘말릴 상황이 됐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생겨난다. 그의 부서만은 공멸을 이유로 춘투에 참가하지 않고 공장에 남아 납기를 지켰다. 이 결과 그의 명성과 기술력은 나날이 높아갔다. 그만큼 패기와 열정도 커졌다. 결국 지인들의 권유와 출자로 58년 ‘쿄토세라믹’을 창립한다. 승승장구는 계속 이어진다.교토세라믹은 창업 초기 마쓰시타전기로부터 수주를 받아 사업했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시장확대가 불가피했다. 동시에 무명의 교토세라믹에는 진입장벽도 실로 대단했다. 돌파구는 해외진출이었고, 온갖 노력 끝에 64년 시장공략에 성공했다. 66년에는 어렵기로 소문난 IBM 표준에 합격해 글로벌 경쟁사를 제치고 IC용 집적회로용기판 2,500만개를 수주했다.IBM과의 거래를 계기로 수출은 급증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반도체산업이 활황기를 맞았다. 각고의 노력 결과 내놓은 신제품의 반응도 뜨거웠다. 71년에는 거래소 상장까지 끝냈다. 하지만 호사다마였다. 오일쇼크는 수주격감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 교세라의 대가족주의는 지켜졌다. 임금동결은 있었지만 감원은 없었다. 위기는 곧 극복됐으며, 이를 계기로 이나모리 회장은 사업다각화에 나선다.창립 20주년인 79년은 교세라의 일대 전환기다. 정보통신기기사업의 기술 토대가 되는 트라이텐트사와 사이버네트공업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82년에는 교토세라믹에서 교세라로 사명을 바꾼다. 이듬해에는 세계 최초로 일렉트로닉스 카메라를 만든 야시카까지 합병했다. 84년 새로운 기회가 다가왔다. 전기통신사업의 민영화가 허용되면서 DDI(第2電電)를 설립했다. 87년 결국 시외전화 서비스 개시에 성공했다. 경쟁 3사 중 1위에 올라섰다. 이동통신에도 도전장을 냈다. 89년에는 세계적인 종합전자부품 메이커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의 엘코그룹과 90년에는 AVX를 인수했다. 이 여세를 몰아 2000년 국내 2위의 종합전기통신회사인 KDDI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오늘의 교세라그룹은 완성됐다.“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를 다양한 활동가로 이끈다. 국경을 넘은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지원이 필요한 사회사업(학술ㆍ문화ㆍ지역사회 등)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이나모리재단이 발족돼 과학자·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교토상’을 만들고, J리그의 교토퍼플상가를 지원한 게 대표적이다. 경영철학 전수를 이유로 80년 시작된 조그만 연구회는 오늘의 ‘세이와주쿠’(盛和塾)로 발전했다. 97년 그는 출가를 감행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다. 부와 명예보다 선행을 원했던 결과다.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수양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넷째사위로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약력: 1932년 일본 가고시마 출생. 55년 가고시마대 공학부 졸업. 55년 쇼후공업 입사. 59년 교토세라믹(현 교세라) 설립ㆍ기술부 이사 취임. 66년 교세라 사장. 85년 교세라 회장. 97년 교세라 명예회장(현). 84년 DDI(현 KDDI) 창업. 2001년 KDDI 최고고문(현). 84년 이나모리재단 설립ㆍ교토상 창설. CEO 양성 위한 세이와주쿠(盛和塾) 교장. 97년 출가 후 파계. △저서: <이나모리 가즈오의 철학> <성공에의 정열> <일본에의 직언> <살아가는 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