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외국계 기업이 한국 진출을 선언하면 이는 중요한 뉴스거리가 된다. 각종 매체는 한국경제가 외국인투자가의 관심 대상에 들 정도로 성장했다는 데 고무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경제가 조만간 외국자본에 의해 휘둘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적용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애국심에 호소해 국산품 애용을 부르짖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같은 글로벌 경쟁체제 속에서도 오히려 토종의 기세에 해외 유명회사가 맥을 못추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소비자의 독특한 성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이런 현상은 특히 생활용품, 의류 등 고객과의 접점이 방대하게 퍼져 있는 업종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생활용품은 백화점, 할인매장 외에 소규모 점포에서도 취급하고 있어 오랜 노하우를 갖춘 외국의 유수 기업체일지라도 정확한 타깃 파악이 어렵다는 얘기다.따라서 다국적 기업의 공세에 맞서 꿋꿋하게 토종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3개 업체의 노하우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나마 남아 있던 토종기업마저도 줄줄이 외국계 손에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국내시장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소비자를 잘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외국계 업체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묶여 빠른 전략변화가 어려운 반면, 기민한 움직임으로신속하게 다국적 기업에 맞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생활용품 1위, LG생활건강샴푸, 치약, 비누, 세제 등으로 구성된 생활용품시장의 규모는 연간 1조9,000억원 정도다. 전세계 생활용품시장은 다국적 기업 P&G와 유니레버가 1ㆍ2위로 사실상 장악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토종 브랜드가 막강파워를 뽐내고 있는 나라로 손꼽힌다. 특히 LG생활건강은 40%대의 시장점유율로 국내 생활용품 1위 업체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현재 생활용품 분야에서 다국적 기업이 진출한 국가 중 자국 업체들이 시장을 지키고 있는 곳은 일본과 우리나라 정도에 불과하다.LG생활건강의 시장 수성은 프리미엄 샴푸시장에서 두드러진다. 이 회사 프리미엄 샴푸 엘라스틴은 마케팅 전문조사기관 AC닐슨 조사에서 지난해 6월 이후 계속 1위를 차지하고 있다.2000년에 약 400억원 규모였던 프리미엄 샴푸시장은 지난해 약 1,600억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 전체 2,400억원으로 추정되는 샴푸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프리미엄 샴푸시장이 이처럼 급성장한 이유는 샴푸의 주소비층인 젊은 여성이 모발에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 2000년까지 P&G와 유니레버 등 다국적 기업이 독주하던 시장에 2001년 초 엘라스틴이 가세하면서 프리미엄 샴푸시장이 급팽창하기 시작했다.후발주자인 엘라스틴이 매머드급 다국적 경쟁자인 P&G와 유니레버를 앞서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여성 소비자를 정확히 분석했기 때문이다.90년대 후반만 해도 국내에는 프리미엄 샴푸시장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샴푸라는 제품이 국내에 첫선을 보인 것은 60년대 후반으로 90년대 후반에는 세정 위주의 샴푸에 약간의 트리트먼트 기능을 더한 제품이 나와 있을 뿐이었다. 프리미엄 샴푸시장은 다국적 기업이 신제품을 내놓기 시작한 2000년대에야 형성되기 시작한 셈이다.2001년 2월에 국내 토종업체로는 처음으로 프리미엄 샴푸 엘라스틴을 내놓은 LG생활건강은 외국계 기업과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으로 차근차근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기 시작했다.기능 설명 위주의 마케팅 방식을 채택한 외국계 업체들과 달리 감성마케팅을 전격적으로 도입했다. 전지현이라는 빅모델을 기용한 대규모 TV 광고를 통해 일반인이나 유명인사를 활용한 경쟁사와의 차별을 꾀했다.LG생활건강측은 철저하게 2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감성마케팅을 적용해 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바탕을 두고 최근에 마련한 이벤트는 ‘뉴비틀’ 차량을 이용한 행사다. 젊은 여성이 좋아하는 차종으로 꼽히는 ‘뉴비틀’에 엘라스틴 로고와 모델 전지현의 모습을 새겨넣어 서울시내를 주행케 한다.다국적 기업이 생활용품 분야에서 발을 못 붙인 사례는 주방세제에서도 나타난다. 90년대 후반 P&G의 초세정 주방세제 ‘조이’는 일본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P&G측은 이 세제가 한국시장에서도 주목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을 감지한 LG생활건강에서는 같은 제품군의 ‘자연퐁싹’을 내놓았다. 또 애경은 ‘순한샘한방울’을 선보였다. 이로 인해 한국 진출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이의 시장점유율은 2%대에 머무르고 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주방세제는 생활용품부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품은 아니지만 세탁세제시장의 전초 격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소스시장 최강자, 오뚜기오뚜기는 케첩과 마요네즈 등 국내 소스시장의 최강자다. 수년째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며 다국적 기업이 발디딜 틈을 주지 않는다.마요네즈의 경우 오뚜기가 지난 72년 첫 제품을 내놓으며 시장을 개척했다. 이후 73년 서울식품이 ‘소머리표’라는 마요네즈를 선보였지만 오뚜기는 경쟁에서 승리를 거둬 8년여 동안 독점상태에 있었다. 그후 80년에는 롯데삼강이 ‘리얼 마요네즈’를 내놓았고 이어 81년에는 다국적 기업 크노르의 마요네즈가 한국땅에 상륙하며 세력을 과시했다. 미국 CPC인터내셔널과 조미료업체였던 미원(현 대상)이 각각 50%씩 출자해 만든 합작회사인 한국크노르에서 리본표 마요네즈를 판매한 것.리본표 마요네즈 판매를 맡았던 미원은 당시 조미료부문에서 독점적 지위에 있었던 만큼 유통망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또 회사 자체의 규모도 오뚜기에 비해 10배나 컸다. 여기에 당시 소비자들 사이에 만연했던 외제 선호 경향까지 힘을 발휘해 외제 브랜드인 크노르 마요네즈는 선전을 했다. 그 결과 크노르 마요네즈의 시장점유율은 35%까지 솟아올랐고 오뚜기 마요네즈는 독점상태에서 한때 55%까지 하락하고 말았다.대응책 마련을 고심하던 오뚜기는 갤럽과 리스피알 등 전문조사기관을 통해 소비자조사에 들어갔다. 결국 84년 ‘골드 마요네즈’라는 신제품을 개발하며 ‘고소하다’는 광고 용어를 부각시켰다. 또 튜브 용기 제품을 출시하며 용기를 병과 튜브로 다양화했다. 또 애국심 마케팅을 펼치며 오뚜기가 ‘품질 좋은 우리 상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개성상인 출신의 함태호 오뚜기 회장은 “토종기업이 외국기업에 자리를 내줘서는 안된다”고 전직원에게 힘줘 강조했다.판매현장의 진열 전략도 놓치지 않았다. ‘진열이 곧 판매’라는 슬로건 아래 매장 내 소비자들의 동선 중 가장 눈에 잘 띄는 이른바 ‘골든 스페이스’(golden space)를 공략했다. 이런 다채로운 전략으로 결국 오뚜기 마요네즈는 다시 시장점유율 1위를 거뜬히 고수했다. 시장경쟁에서 밀린 CPC인터내셔널는 96년 미원과의 합작관계를 청산하고 급기야 철수했다. 그후 87년 서울식품과 미국하인즈가 만든 합작회사 서울하인즈에서 마요네즈를 판매했고 94년에는 동원산업이 서울하인즈의 OEM으로 ‘센스 마요네즈’를 선보였다. 서울하인즈의 경우 초창기 10%의 시장점유율을 보이다 결국 3% 미만으로 추락하며 미미한 시장점유율을 보였다. 오뚜기 마요네즈는 9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80% 전후의 시장점유율을 보이며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오뚜기와 다국적 기업과의 전쟁은 또 한번 되풀이됐다. 이번에는 마요네즈가 아닌 케첩시장에서였다. 미국 하인즈사는 서울식품과 접촉, 85년 51대49 출자 비율로 서울하인즈라는 법인을 만들었다. 서울하인즈는 글로벌 브랜드 이미지를 활용해 높은 품질을 강조하며 높은 가격의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미국 CPC인터내셔널 합작사와의 피나는 경쟁에서 승리했던 오뚜기는 케첩시장 또한 뺏길 수 없었다. 이미 ‘골드 마요네즈’를 판매하며 선보였던 공격적 마케팅을 케첩시장에도 적용했다. 결국 하인즈 케첩은 판매 4~5년 후 시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뚜기 케첩의 시장점유율 또한 90년대 초반부터 80% 전후를 고수하고 있다.올 10월 AC닐슨 자료 기준으로 오뚜기 마요네즈는 79.2%, 케첩은 78.5%의 시장점유율을 보였다. 이밖에도 분말카레는 올 10월 기준으로 92%의 시장점유율을, 마가린은 66.6%를 차지하며 소스시장 1등 기업임을 자부한다.트래디셔널 캐주얼 1위, 빈폴우리나라 의류산업은 수입업체가 시장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전형적인 예다. 최근 몇 년새 많은 의류브랜드가 문을 닫았고 주요 백화점은 수입브랜드 위주로 의류매장을 개편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이런 가운데 ‘빈폴’은 국내 고유 브랜드로서 확고한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제일모직의 대표 브랜드 빈폴은 특히 트래디셔널(traditional) 캐주얼의 대명사로까지 자리를 잡아온 ‘폴로’를 제치고 거둔 성과여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지난 8월 한국능률협회가 실시한 브랜드 평가에서도 빈폴은 폴로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해 주목받는 토종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굳혔다.89년에 첫선을 보인 빈폴은 첫해 68억원 매출로 시작해 매년 30% 이상 성장을 거듭했다. 꾸준히 시장점유율 2위를 유지하다 2001년부터는 1위로 올라섰다.빈폴의 강점은 디자인 차별화와 고급 브랜드 이미지 구축이다. 폴로가 영국의 정통성에 기초를 두고 이를 미국식으로 바꾼 스타일이라면 빈폴은 폴로 스타일을 한국 소비자에 맞게 변형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고급 캐주얼 소비자를 겨냥해 자연친화적 소재를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세일을 남발하는 대다수의 국내 의류브랜드와 달리 94년 노세일 정책을 선언하면서 고급 브랜드로서의 명성을 이어온 것도 폴로와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국내 의류시장은 빠른 속도로 글로벌 브랜드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빈폴은 런칭 때부터 글로벌 브랜드가 쓰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 왔다. 따라서 이것이 15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도 1위 업체의 입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힘이 되고 있다.노세일 정책 이외에 빈폴이 파격적으로 실시한 마케팅 전략은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이다. 빈폴은 국내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플래그십 스토어를 서울 명동(지난해 8월)과 강남(올해 9월)에 잇달아 냈다. 플래그십 스토어는 브랜드의 표준모델을 제시하는 동시에 브랜드의 성격과 이미지(BI)를 극대화한 매장이다. 여러개 라인을 가진 브랜드가 각 라인별 상품을 구분해 보여줘 소비자에게 이용의 기준이 될 트렌드를 제시하는 대형점을 의미한다.빈폴은 폴로 등 세계적인 브랜드업체에서 쓰는 브랜드 확장 전략도 일찌감치 시도했다.기존 브랜드의 명성을 바탕으로 다른 복장의 의류시장에도 브랜드를 진출하는 전략인 확장전략은 강력한 브랜드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시도하기 어려운 마케팅 방식이다.2001년 봄 런칭한 빈폴 레이디스에 이어 빈폴 옴므, 빈폴 골프, 빈폴 진을 계속해서 런칭 했다. 2003년에는 빈폴키즈를 내놓으면서 빈폴맨즈, 레이디스, 골프, 옴므, 진, 키즈, 액세서리까지 총 7개의 서브 브랜드를 갖췄다.돋보기 눈길 끄는 LG헤지스 광고또 다른 토종브랜드의 ‘빅3’ 지키기LG패션의 헤지스(Hazzys)는 2000년부터 선보인 토종 트래디셔널 캐주얼 브랜드다. 최근 이 회사가 제작해 방영을 시작한 ‘굿바이, 폴’이라는 주제의 TV광고는 독특한 비교 광고 기법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토종브랜드로서 폴로, 빈폴과 함께 트래디셔널 브랜드 ‘빅3’에 드는 등 선전하고 있는 헤지스의 새로운 광고는 경쟁업체인 폴로와 빈폴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을 담았다.먼저 낡은 자전거를 탄 여자가 보도 위를 달린다. 그리고 헤지스 매장의 쇼윈도에 시선을 사로잡힌다. 그녀가 입고 있는 연미복과 모자는 쇼윈도의 옷에 비하면 구시대적이다. 그녀는 홀린 듯 자기도 모르게 매장 안으로 들어선 뒤 잠시 후 매장을 나서면서 더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때 세워놓았던 자전거는 그녀에게 외면당해 힘없이 넘어진다. 헛도는 바퀴소리와 함께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는 “굿바이 폴”이다.이번에는 매장 앞에 말을 탄 폴로선수가 등장한다. 역시 쇼윈도에 시선을 뺏긴 남자는 한참을 바라만 보다 매장에 들어선다. 매장에서 나온 남자는 폴로 복장을 벗고 새옷을 입었다. 여자가 자전거를 버렸듯 남자는 타고 온 말을 그대로 둔 채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마지막 그의 한마 디 역시 “굿바이 폴”이다.광고의 주인공은 입고 있던 옷과 함께 자신이 타고 온 자전거나 말을 버리고 사라진다. 업계 1, 2위 브랜드인 빈폴(BEAN POLE), 폴로(Polo)와 이별하라는 의미를 재미있게 풀어낸 것이다.강동민 LG패션 광고팀 과장은 “소비자들이 국내 트래디셔널 캐주얼 시장의 1, 2위인 빈폴, 폴로와 함께 자연스럽게 헤지스를 떠올리고 기존 두 브랜드와는 다른 세련된 감성이 느껴지는 헤지스를 경험해 보라는 뜻에서 이런 비교 광고 캠페인을 실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