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키워드로 삼는 비즈니스는 분야를 막론하고 확산 일로에 있다. 영화, TV 드라마, 콘서트 등 대중문화에서 식품, 게임, 스포츠, 축제에 이르기까지 그 조짐이 뚜렷하다.실제로 추억을 강조하는 마케팅 기법은 ‘불황을 뚫는 묘책’으로 통한다.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적당한 감성 자극을 통해 굳게 닫혔던 지갑까지도 열게 하는 ‘마술’이다. 정강환 배재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고객의 심금을 울려 빠른 효과를 내는 데는 추억 마케팅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불황에는 가장 좋았던 시기, 과거로의 회귀를 바라는 잠재의식이 짙게 깔려 있어 추억 비즈니스가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고 밝혔다.식품 =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던 옛날 제품이 불황을 뚫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삼립식품의 경우 동종업계가 불황 속에 고전하고 있음에도 추억마케팅에 힘입어 지난해부터높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올 상반기에만 전년 대비 9%대의 성장세를 보였다.60년대 크림빵을 재현한 ‘삼립크림빵’은 업계에서 ‘완벽한 리바이벌’로 불린다. 포장과 모양, 맛 등 모든 면에서 ‘옛날 크림빵’을 떠올리게 만들어 다시금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 추억마케팅이 식품업계에서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 것은 물론 트렌드를 제품 기획에 시의 적절하게 반영해 대박을 터뜨린 케이스로 통한다.판매실적은 가히 기록적이다. 올 상반기에만 1,400만개가 팔려 하루 평균 8만개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매출액으로 환산하면 약 60억원에 달해 동종업계 단일품목 최고 판매기록을 세웠다. 올해 120억원 판매가 목표다. 명맥만 유지하던 지난해와 비교하면 무려 12배가 늘어난 것. 김승호 상무는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던 60년대를 추억하며 불황을 극복하자는 게 크림빵의 복원 취지”라고 밝히고 “지난해 자동화 생산설비와 수차례에 걸친 제품테스트를 통해 60년대 수작업으로 만든 크림빵의 맛과 공정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크림빵의 인기를 바탕으로 보름달, 옥수수빵, 단팥빵 등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제품들을 선정, ‘추억의 빵’ 시리즈로 출시하기도 했다.수십년 전통을 자랑하는 과자들도 요즘 부쩍 판매가 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출시돼 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해태제과 ‘연양갱’의 경우 올 들어 젊고 신선한 이미지로 리뉴얼에 성공했다. 특히 웰빙 열풍에 힘입어 신세대 입맛까지도 사로잡는 영양간식으로 부활에 성공했다는 평. 지난해 월 10억원선에 머물렀던 매출은 올 들어 월 35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소성수 과장은 “단일품목으로 월 10억원 매출을 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하고 “과거 ‘어른 전용 간식’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스포츠 등 야외활동에 적합한 신세대 영양간식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태제과는 올해 ‘연양갱 호두’를 새롭게 출시하는 한편 앞으로 월 40억원까지 매출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공연 = 올해 선보인 국산 공연상품 가운데 최고 히트작은 ‘7080콘서트’. 송골매의 구창모, 샌드페블즈, 이명훈과 휘버스, 옥슨80, 장남들, 라이너스, 건아들, 로커스트, 블랙테트라 등 70~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이 다시 뭉쳐 누구도 예상 못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공연기획사 컬처피아가 처음 내놓은 ‘7080콘서트’는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전국 16개 도시에서 18만명을 동원했다. 총매출만 40억원이 넘는다. 처음 공연을 기획한 황규학 사장은 “출연 가수들이 깜짝 놀랄 만큼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말하고 “30~50대가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을 모티브로 삼은 덕에 히트를 친 것 같다”고 밝혔다. 80년대 초반 고교시절 그룹사운드 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는 황사장은 “우리 세대에 맞는 공연이 없다”는 생각에 7080콘서트를 착안했다고.콘서트가 히트하면서 유사 공연도 크게 늘었다. 전국 각지에서 중년 동창들이 밴드를 결성하는가 하면 지방에서 활동 중인 가수들도 ‘7080’을 내세운 콘서트를 속속 선보이고 있다. 지상파 TV까지 7080콘서트를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할 정도다. KBS 1TV는 11월6일부터 ‘콘서트 7080’을 신설하고 송골매 리더 배철수씨(51)를 진행자로 내세웠다. 지난 추석에 특집으로 선보였던 ‘7080 추억의 빅콘서트’에 중년 시청자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계기가 됐다.한편 ‘원조’ 7080콘서트는 올 12월3~4일 서울 앙코르 공연과 미국 LA,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순회공연을 남겨놓고 있다. 이와 더불어 출연진 모임인 대가회(대학가요회)는 ‘7080’을 브랜드화하기 위해 특허신청을 내놓았다.게임 = 추억의 게임 역시 재조명받고 있다. ‘뿅뿅’이라는 전자음이 연상되는 이른바 ‘전자오락실 게임’이 모바일과 인터넷에서 다시금 부활했다.80년대 초중반 전자오락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대표적인 오락실게임의 고전 갤러그의 경우 SK텔레콤 ‘네이트’와 KTF ‘매직엔’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모바일게임업체 이오리스가 갤러그를 모바일게임 ‘신갤러그’로 만들어 올 초부터 서비스한 데 따른 것이다. 50원짜리 게임에 목매며 점수 올리기에 열중하던 30~40대라면 손바닥 안에서도 옛날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된 셈. 이오리스는 또 게임 포털사이트 ‘와게임’(www.wagame.com)을 통해서도 ‘갤러그 온라인’, ‘퍼즐버블 온라인’ 등 추억의 아케이드게임을 서비스 중이다. 예전 오락실에서 보던 화면을 그대로 재현해 호평을 받고 있다.대부분의 오락실게임들은 일본 게임제작사가 저작권을 보유, 한정된 사이트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대전 액션게임의 대명사 스트리트 파이터의 경우 엠게임(www.mgame.com)이 98년작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온라인’을 서비스하고 있다. 비행슈팅게임 스트라이커즈 1945는 게임유에프오(www.gameufo.com)가 서비스 중이다.한편 게임을 직접 하지 않아도 글을 통해 옛 오락실 게임의 향수를 나누는 사이트도 있다. 아케이드온라인은 오락닷컴(www.ohrock.com)을 통해 오래된 아케이드게임의 이모저모를 네티즌과 공유하고 있다. 운영자인 박금섭 팀장은 “2002년부터 오락실게임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게임운영 전략, 점수 따는 요령 등 10~20년 전 열중하던 게임을 연구하며 정보를 주고받는 30~40대 네티즌이 적잖다”고 밝혔다. 시간이 흘러도 오락실게임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는 것. 이 회사는 롯데타운(game.lottetown.com)을 통해서 너구리 등 추억의 게임도 서비스 중이다. 내년에는 ‘옛사랑’을 주제로 한 교류사이트를 본격 운영할 예정.기타 = 쫀드기, 아폴로 등 이른바 ‘불량식품’으로 잘 알려진 ‘추억의 먹거리’는 이미 수많은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각설탕과 국자, 소다를 패키지로 포장한 달고나는 10여개 쇼핑몰에서 하루 100만원 이상 판매고를 기록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아폴로만 생산하는 아폴로제과의 경우 쇼핑몰과 전국 문방구에 납품하면서 최근 1~2년 사이에 매출이 크게 늘었다.‘불량식품’은 일부러 ‘10원’ 마크가 선명한 옛날 포장을 그대로 살려 향수를 자극하는 게 공통점. 단 식품위생법을 통과해 품질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어릴 적 갖고 놀던 장난감, 지금은 사라진 갖가지 옛날 물건을 한자리에 모아 판매하는 가게도 인기가 대단하다. 딴지일보의 경우 쇼핑몰을 통해 종이딱지, 못난이인형, 비누방울, 본드 풍선, 공책세트 등을 1만~1만5,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지금은 보기 힘든 주황색 공중전화는 100만원. 서울 신촌의 ‘깜부’나 인사동의 ‘토토의 오래된 물건’도 20~30년 전 물건이 가득한 특이한 가게다. 서울우유병, 교련복, 태권브이로봇 등에서부터 채변봉투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다. 민권규 토토의 오래된 물건 대표는 “20대 젊은층은 신기해하고, 30대 이상 중장년층은 회상에 젖곤 한다”며 “희귀성 때문에 팔 수 없는 물건도 많아 안타까워하는 고객이 많다”고 전했다.INTERVIEW 민권규 ‘토토의 오래된 물건’ 대표“지금 지닌 물건이 30년 후에는 골동품”“70년대 1학년 국어책을 보며 ‘어떻게 저게 아직도 남아있지?’라며 신기해하고, 빨간색 마크가 그려진 서울우유병을 바라보며 “흰 우유 참 맛있었는데”라고 말합니다. 검정색 중학교 교복을 보며 아들에게 “아빠, 학교 다닐 때 저 옷 입고 다녔어”라며 회상에 잠기는 모습에서 추억의 힘을 느끼죠.”60∼80년대 물건들이 가득 한 서울 인사동의 ‘토토의 오래된 물건’은 점포라기보다 전시관에 가깝다. 대여섯평 공간에 빼곡한 수천종의 물건 가운데 판매하는 것은 극소수, 나머지는 소장품이다. 그나마 선보이는 것은 10분의 1에 불과하다니 창고에 ‘모셔져’ 있는 물건들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힘들다.도예를 전공한 민권규 사장은 서울 장한평 ‘고미술 상가’ 근처에 작업실을 열면서 골동품과 친해졌다고. 지난 96년 인사동으로 옮기면서 평범한 골동품가게 대신 ‘네오 앤티크(Neo Antique)전문점’으로 방향을 정했다. 고리타분한 골동품이 아닌 젊은층도 쉽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오래된 물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1970년대 쓰고 보았던 물건들을 지방 골동품가게를 돌아다니며 하나둘 구해 진열하자 ‘토토’는 곧 인사동의 명물이 됐다. 최근 불고 있는 추억 비즈니스의 원조 격인 셈.“한 세대 전의 물건, 즉 1970년의 물건들을 2004년 지금에는 ‘네오 앤티크’라고 하거나 ‘근대사 물건’이라 지칭합니다. 일본이나 미국, 유럽 등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 세대 전 물건들도 골동품으로 생각하고 많은 수집가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요. 몇 년 전 일본에서는 60년에 양철로 만든 아톰 장난감이 5,000만원에 팔린 적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 쓰고 보는 모든 물건들이 2030년에는 추억이 돼 다시 골동품이 돼 있을 겁니다.”INTERVIEW 가수 구창모7080콘서트 주역 “중년에게 희망을”“관객과 가수가 나이 들어 다시 만나니, 타임머신을 타고 20대로 돌아간 기분이 되더군요. 인생의 최고 황금기를 다시 경험했다고 할까요. 대중문화에서 소외돼 있다시피 한 중년팬들에게도 무척이나 반가운 무대였나 봅니다.”80년대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희나리’ 등의 노래로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그룹 송골매의 보컬 구창모씨(50). 어느새 중년의 나이가 된 그는 지난 4월 15년 만에 무대에 복귀, 18만명의 청중을 모아 변함없는 저력을 보여줬다. 본인도 놀랄 만큼 반응이 폭발적인 것은 물론 공연마다 따라다니는 극성팬이 생겨 제2의 전성기가 따로 없을 정도다.“음반시장이 불황이라는 것은 구매력 있는 30~40대를 위한 음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콘서트에서 이들의 문화 향유 욕구가 어느 정도인지 읽을 수 있었어요. 가수와 관객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이 수요를 위한 음반사업의 성공포인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무역업을 하며 사업가로도 경력을 쌓은 구씨는 ‘추억비즈니스’의 전망을 대단히 밝게 내다봤다. 단 추억에만 의지해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게 그의 생각.“7080 대학가요도 소프트웨어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언제까지 같은 노래, 같은 쇼만 보여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주소비층인 30~40대가 충분히 대가를 지불하며 문화상품을 살 수 있도록 만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년에 그런 앨범을 내놓을 작정입니다. 기대하세요!.”팬들이 환호하는 무대로 돌아온 구씨의 얼굴은 80년대 전성기와 다름없이 밝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