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재벌을 향한 SK의 움직임이 가속도를 내고 있다. 최태원 회장을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고, 내부분위기 또한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특히 전임직원이 힘을 합쳐 한국적 대기업 모델을 정착시키겠다는 의욕이 넘쳐나고 있다.사실 그동안 국내 재벌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이 많았다.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재벌 하면 왠지 긍정적인 면보다 그 반대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특히 불투명한 의사결정구조, 부당한 내부거래, 복잡한 출자구조 등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쏟아졌다.SK의 새로운 기업모델 만들기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추진되고 있다. 특히 돈이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출자구조 문제를 제외한 의사결정구조, 내부거래 문제에 대해서 기존의 문제점을 해결한 획기적인 모습을 선보여 기업모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고 시스템을 통한 경영에 적극 나서는 등 투명성을 높이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SK가 도입한 ‘포스트 재벌’ 모델은 계열사간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최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주목된다. 경영의 투명성이 크게 나아진데다 지배구조 역시 훨씬 간결해져 계열사끼리 상호 윈윈(Win-Win)에 기반한 시너지 경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의사결정구조 ‘대대적 혁신’재벌경영의 병폐로 황제식 경영을 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오너가 마치 황제처럼 모든 경영에 간여해 기업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산업화 시대에는 강력한 사업추진을 위해 일사불란한 의사결정구조가 필요했고, 실제로 기업들 역시 많은 효과를 봤다.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특히 9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외국인들이 대거 한국증시에 참여하면서 재벌식 의사결정구조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특히 요즘처럼 서로의 역할이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상황에서는 역효과가 우려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이에 따라 SK 역시 ‘포스트 재벌’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로 지배구조의 혁신을 정해 놓고 있다. 지배구조를 바꾸지 않고 탈재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새로운 경영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으로 여기고 철저하게 추진하고 있다.그렇다면 SK의 지배구조 개선 노력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사람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1인 지배체제를 지양하고 시스템을 통한 회사경영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특히 이 과정에서 SK그룹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이사회 기능의 강화다. 이사회는 기업에서 최상위의 의사결정기구이자 집행부서에 대한 감독기관이다. 따라서 이사회만 제대로 돌아가도 감히 누구도 재벌식 경영이라고 주장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이사회가 경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하다.물론 여기에는 최태원 회장의 소신이 크게 반영됐다. 외부강연 등을 통해 이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최회장은 “이사회가 독립적이면서 투명하게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고, 한편으로 효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하는 이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그런 면에서 SK(주)가 도입한 이사회 시스템은 재계의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구체적으로는 그동안 50대50의 사내ㆍ외이사 구성비율에서 사외이사를 70%로 높이는 획기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사외이사 70%의 의미는 주주와 이사의 뜻에 따라 경영을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심지어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할 경우 회사는 도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새로운 이사 구성비율은 오너나 경영진의 입김보다 주주에 의한 경영,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또 하나 파격적인 것은 소액주주와 외국인 주주 등 모든 주주를 대상으로 사외이사를 공개적으로 추천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주주라면 누구든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사외이사 추천이 가능하고, 실제 500여명이 추천을 받기도 했다. 또 후보추천에 회사측의 입장이 개입될 수 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공신력 있는 외부인사 5명으로 구성된 ‘사외이사 후보추천 자문단’을 만들기도 했다. 최태원 회장 본인도 한 명의 이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SK(주)는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일하는 이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사외이사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사회 사무국을 신설하고 사외이사들에게 사무실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외이사들이 자주 회사에 나올 수 있도록 측면 지원하고, 궁금해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수시로 회사 관계자를 불러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다양한 전문위원회를 설치한 것도 ‘일하는 이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치다. 신설된 전문위원회는 크게 4개로 투명경영위원회, 제도개선위원회, 전략위원회, 인사위원회 등이 포함돼 있다.부당내부거래 ‘원천적 봉쇄’재벌들의 행태 중 지탄을 받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당내부거래다. 이는 잘나가는 계열사가 어려운 계열사에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우량회사 입장에서는 회사가치의 일부를 엉뚱한 곳에 쓰는 만큼 일반 주주들 입장에서는 여간 손해가 아니다.지금도 상당수 회사들이 이 문제로 주주들의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끊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많은 규제가 있지만 적당한 방법을 동원해 도와주는 일이 적지 않다. 하지만 SK는 ‘포스트 재벌’을 지향하면서 이 점에 대해서도 분명한 선을 그어놓은 상태다. 적절치 않은 내부거래는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특히 순이익이 많이 나다 보니 계열사간 부당지원의 소지를 갖고 있는 SK텔레콤과 SK(주)를 중심으로 시스템적으로 내부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단순히 내부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적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적, 실질적인 시스템을 통해 부당한 거래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이와 관련, SK는 지난해 구조본을 해체하면서 ‘계열사간 윈윈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계열사는 시장원리에 맡겨 부당내부거래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한다’는 기본방침을 밝히기도 했다.구체적으로 SK텔레콤은 이미 100억원 이상의 모든 계열사간 거래에 대해서 이사회의 결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특히 모든 거래관계에 대해서 이사회가 검증하도록 하는 내부거래 위원회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또 SK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SK(주)는 SK텔레콤의 내부거래위원회와 유사한 성격의 투명경영위원회를 신설해 계열사간 내부거래를 사전에 심의한다. 투명경영위원회는 일종의 전문위원회로 2명의 사외이사와 1명의 사내이사로 구성, 사외이사에 의한 회사견제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다.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이 위원회의 경우 계열사간의 내부거래를 포함해 모든 경영행위를 포괄적으로 검증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내부거래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윤리경영을 시스템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경영이 정착될 수 있도록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다. SK(주) 내 최고의 심의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전문가들의 평가SK의 대대적인 변화에 대해 외부의 시선은 따뜻하다. 다른 기업들이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시스템을 잇달아 도입하면서 ‘잘할 수 있을까’ 하던 시선은 온데간데없고 뭔가 다르다는 의견들이 쏟아지고 있다.특히 참여정부의 재벌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SK그룹은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고 브랜드와 이미지만을 공유하는 기업으로 간다고 했는데, 기업 독립성이 높아지면 무분별한 상호출자전환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삼성도 (SK그룹처럼) 갈 수 있으면 가는 것이고…”라며 다른 기업에 권유하기도 했다. 강위원장은 한국 내 대표적인 재벌 개혁론자로 평소 독설을 퍼붓기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또한 강위원장은 이런 말도 했다. 지난 5월 말 최태원 회장과의 만남 직후 기자들에게 “사외이사 비중의 확대(50%에서 70%로), 사외이사 후보추천자문단 등 사외이사 독립성 제고를 위해 추천절차의 개선 및 투명경영위원회 설치 등은 이사회 독립성 및 통제기능 강화를 통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제도적인 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강조했던 것.강위원장 외에 SK(주)와 지분싸움을 벌여온 소버린이 추천한 사외이사후보 중 이사가 된 남대우씨도 공개적으로 “SK가 사외이사 비율을 70%로 늘리고 4개의 전문위원회를 설치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사외이사 개인별 집무실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해 사외이사가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한국에서 유례없는 지배구조 개선의 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성과로 나타나는 ‘포스트 재벌’ 효과지배구조 개선과 실적은 상관관계가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일단 효과가 크다는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특히 SK의 사례를 보면 뚜렷한 실적향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재계 일각에서는 SK의 지배구조 개선이 실적향상의 일등공신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먼저 그룹 전체를 보면 올해 상반기에 매출액이 26조원을 넘어서는 등 불황을 크게 비껴간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이 가운데 순이익만 3조원에 달해 재무적인 측면에서도 포스트 재벌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으로 평가된다.SK(주)와 SK텔레콤, SK네트웍스 등 주요 상장 계열사들의 실적 역시 일제히 상승곡선을 그린 것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거둔 실적이라 의미 또한 남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특히 대대적인 혁신작업을 벌이고 있는 SK(주)의 경우 실적이 지난해에 비해 월등히 개선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구체적으로는 상반기 매출액이 7조9,653억원에 달하고 순이익 역시 7018억원을 기록했다. 순이익률이 매출액의 10%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우수하다.이에 따라 주가 역시 큰 폭의 상승세를 나타냈다. 2003년 초 1만4,000~1만5,000원을 오르내리던 것이 최근에는 5만7,000원 내외로 급상승해 투자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주가상승에는 다른 요인도 영향을 미쳤지만 개혁적인 부분 역시 크게 어필한 것으로 분석된다.INTERVIEW 오세종 SK(주) 사외이사경영투명성 획기적 개선… 이사 역할 커져SK(주)의 사외이사 가운데 한 명인 오세종 전 장기신용은행장(61)은 금융계의 원로다.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을 거쳤고, SK(주)에 합류해서도 의욕적으로 뛰고 있다. “이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오이사의 눈에 비친 SK(주)와 활동계획 등을 들어봤다.SK의 변화는 국내외에서 주목의 대상인데요.SK(주)가 전체 이사수 10명 중 7명을 사외이사로 구성한 것은 우리나라 기업풍토에서 보면 매우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사외이사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필요에 따라 경영진에 대해 견제기능을 발휘해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하자는 것이지요.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고 또 회사의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도 공정한 결정을 하도록 의사를 개진하고 의결에 적극 참여할 생각입니다.공장과 연구소를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공장과 연구소를 방문하고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SK(주)의 기술력이 매우 높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유(基油)를 생산, 윤활유를 만드는 외국의 석유 메이저들에 수출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지요.사외이사들에게 제공한 집무실에는 자주 나오는지요.사외이사들이 좀더 회사의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해서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의견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나옵니다.이사회 사무국도 만들었는데 실제로 경험해 보니 어떻습니까.SK(주) 지배구조가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논의되는 사항도 많고 회의도 빈번해 별도의 사무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무국의 구성원 모두가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사외이사들과의 호흡도 잘 맞습니다.이사들로 구성된 전문위원회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지요.인사위원회와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에 속해 있으며, 인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위원회 위원장은 100%로 사외이사가 맡고 있어 위원회 활동의 독립성이 철저히 보장되고 있습니다.다른 회사들의 이사회와는 어떤 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자주 모이고,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입해서 각 사안에 대해 토의하고 대화를 나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겁니다.최태원 회장의 행보를 보면 많은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지금 추진하고 있는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의 투명성 확보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SK(주)에서는 지난 주주총회 이후 이사회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회장은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부하직원이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스타일이면서 일단 결정한 사항은 밀어붙이는 강한 추진력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SK(주)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잘아시다시피 같은 수익력을 갖는 회사라면 지배구조가 좋은 기업의 시장가치가 높습니다.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당위성이 있지만 무엇보다 주주의 이익과 직결됩니다. SK(주)는 세계 일류 수준의 지배구조를 지향하고 있고 또 최근에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구조 개선은 어느 기간에 끝나는 한시적인 프로젝트일 수 없고 기업이 활동하고 있는 동안 계속 추진해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SK가 더 좋은 기업이 되기 위한 조언을 해주십시오.21세기는 글로벌 경쟁시대입니다. 세계화의 틀 속에서 보다 진취적이고 전향적으로 경영여건 변화에 대응하고,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기업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므로 우수한 인재확보와 지속적인 교육훈련을 통해서 인력 면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