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더 좋은 지배구조를 만들어 나가겠다.”SK(주)의 최태원 회장이 지난해 2월 구속수감되면서 남긴 말이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최회장의 신념은 98년 회장 취임 당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취임식에서 “1인의 의사결정 체계는 불가능하다”며 기존의 지배구조를 개혁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후에도 최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심지어 SK사태가 발생한 후에도 “좀더 나은 지배구조를 갖는 좋은 회사를 만들려고 했다”는 해명을 하기도 했다.‘GE보다 우수한 지배구조 만들겠다’최회장이 바란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SK(주)의 주식 14.99%를 보유한 소버린이 SK(주)에 대한 적대적 M&A에 나섰기 때문이다. 소버린이 분식회계사건을 빌미로 SK(주)를 주주자본주의에 역행하는 집단으로 몰아붙이며 외국계 투자가를 결집해 나가는 통에 최회장의 경영복귀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소버린이 주총의 표대결에서 패하고 지난해 9월 최회장이 보석석방되면서 최회장에게 ‘기회’가 돌아왔다.옥고를 치른 최회장은 한동안 대외활동을 자제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임직원에게 “지배구조, 사업구조, 재무구조 등 3대 구조개선 사업에 전념하겠다”는 메일을 보내면서 어렵사리 되찾은 ‘기회’의 끈을 다잡아 나가기 시작했다.개혁의 고삐를 쥔 최회장은 과감하고 신속하게 지배구조를 개선해 나갔다. ‘가장 선진적인 지배구조로 평가받는 GE보다 우수한 지배구조’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사외이사의 역할과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지난 2월 “올해 안에 이사회의 사외이사 비율을 50% 이상으로 늘리고 투명경영위원회를 신설해 대주주와 집행이사진으로부터 독립적인 이사회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던 것. 하지만 바로 며칠 후 최회장은 당초 계획을 변경, 사외이사의 비율을 당장 70%로 올려놓았다. 지난 4월 SK아카데미에서 열린 ‘SK그룹 창립 51주년 기념식’에서는 SK(주)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사들의 지배구조 개선을 촉구했다. 이 자리에서 최회장은 “다른 관계사들도 앞으로 명실상부하게 이사회가 최종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율경영체제를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회사 내부적으로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의사결정체제를 구축하는 등 제도개선에 힘을 썼다면 대외적으로는 해외투자가와 직접 만나고 해외 IR행사를 통해 투자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재 SK(주)의 지분 14.99%를 보유하고 있는 소버린에 대항해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서 해외자본 유치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해외자본 유치에 대한 최회장의 열정은 지난 9월 있었던 ‘화상 기업설명회(I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최회장은 모스크바의 한 호텔과 미국의 투자가를 연결, 화상으로 IR를 진행해 화제를 모았다. 이에 앞서 최회장은 서울에서 열린 미국계 자산운용사인 캐피털그룹의 투자전략회의에 참석해 SK(주)의 지배구조개선 실적과 상반기 사업실적을 설명했다. 또 지난 10월 초에는 세계 최대의 기업인 GE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을 만나 한국기업의 지배구조와 투자환경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협력업체 지원 대폭 강화최회장이 짊어진 과제는 지배구조 개선만이 아니다. 분식회계사태로 인해 실추된 기업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도 절체절명의 임무다. 이는 지난 4월 SK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신임임원과의 대화’ 자리에서 최회장이 “신뢰회복 문제는 다른 회사와 구별되는 우리의 과제”라고 강조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신뢰회복을 위해 최회장이 내민 카드는 ‘모든 이해관계자의 행복극대화’였다. 이해관계자들이 행복을 느끼게 되면 신뢰는 자연스레 회복된다는 계산이다. 주목할 것은 이해관계자의 범위다. 최회장이 말하는 이해관계자는 관계사, 주주, 고객, 종업원 등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업을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자, 다시 말해 사회 전체를 의미한다. 이전의 기업철학이 ‘이윤극대화’라는 점을 감안할 때 혁명적인 변화임에 틀림없다.“(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기업의 철학과 행동원칙을 정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바로 SK경영관리체계(SKMS)라는 점에서 SKMS를 재정립해야겠습니다.”‘행복극대화’를 기업철학으로 내건 최회장은 사회공헌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우선 울산대공원 조성에 1,000억원을 기부하고 5월15일 열린 공원 기공식에 참석했다. 이 행사를 전후해 열린 ‘SK울산 사랑 페스티벌’에 참석한 최회장은 ‘사회공헌을 통한 행복극대화’라는 기업이념의 실천을 거듭 다짐했다.지난 7월22일 발족한 ‘SK자원봉사단’도 ‘행복극대화’의 일환이다. 현재 SK는 그룹 차원의 자원봉사를 장려하고 있다. 이를 위해 최회장도 직접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8월2일부터 닷새 동안 진행된 ‘한국 사랑의 집짓기’ 행사에 70여명의 주요 관계사 임직원과 봉사활동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최회장은 “사회의 행복극대화는 실천이 중요해 자원봉사에 직접 참여했다”고 참여동기를 밝혔다.이해관계자의 하나인 협력업체들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고 나섰다. 협력업체의 납품 대금을 현금으로 결제하고 사무실을 제공하는가 하면 협력업체협의회를 개최하고 공동 R&D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등 다각적인 협력모델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기업은행과 제휴해 SK텔레콤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이 발주계약서만으로 일반 신용대출보다 낮은 금리로 생산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이해관계자의 행복’을 위해 SK가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난 추석을 즈음해 추석연휴 및 추석 이후 결제분을 연휴 이전에 조기 결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기업철학의 변화와 함께 최회장의 리더십 스타일도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직원들과 식사를 하고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 부쩍 잦아진 것이다. 올해 초 신입사원과의 대화를 필두로 신임임원 간담회, 신임팀장과의 대화 등 그동안 10여차례나 임직원과 간담회를 가졌다. 또 경영진도 모르게 베이징의 SK차이나 사무실을 방문해 사스사태로 고통을 겪고 있던 임직원들을 격려하는가 하면 창립기념 체육대회에서는 직원들과 어울려 ‘올챙이송’에 맞춰 율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행복극대화’의 일환인 동시에 지난해 홍역을 치르며 흩어졌던 구성원들의 마음을 재결집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정부의 신뢰를 얻는 데도 적극적이다. 지난 5월 청와대 간담회에 참석해 경제활성화를 위한 투자확대 방안을 밝히고 에너지 안보를 위해 자원개발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에 발맞춰 해외자원 개발을 위한 최회장의 행보가 바빠지기 시작했다.각국의 주요 인사를 연이어 만나면서 해외 에너지 개발을 위한 협력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6월에 워커힐호텔에서 페루ㆍSK 우정의 날 행사를 가졌고 7월에는 쿠웨이트의 알 사바 총리를 만났으며 9월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하고 10월에는 베트남을 찾아 부 콴 에너지담당 부수상과 베트남 푸칸분지 광구 개발의 참여를 협의했다.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SK그룹. 새로운 50년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최회장의 실험은 아직까지 성공적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