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양승득 편집장약력: 1946년 제주 출생. 7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7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83년 미국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이코노미스트. 92년 KDI 거시경제팀장. 95년 KDI 법경제ㆍ세계화 개혁팀장. 97년 한국경제연구원 원장(현). △저서 : 국제화시대의 한국경제운영, 진화론적 재벌론, 명령으로 안 되는 경제“참 갑갑합니다.”한국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꼽히는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 원장과의 인터뷰 첫 코멘트다. 인사말도 채 끝나기 전에 그의 얼굴에는 한국경제의 간단하지 않은 현실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인터뷰 내내 좌원장은 격정에 찬 발언과 긴 한숨을 반복했다. 때로는 정치권에 대한 매몰찬 비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표현의 수위도 자못 높았다. 이 초로의 경제학자가 보는 2004년 맹서의 한국경제는 ‘답답함’ 그 자체였다.좌원장은 자산디플레와 관련해 일본을 자주 강조했다. 대뜸 “일본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득세한 때가 언제냐”고 되묻더니 “자민당 몰락과 일본경제 침체(자산디플레 등) 사이에는 확실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화두를 던졌다. 따라서 최근 경제학자들이 입에 담는 ‘불황’이라는 단어는 이런 정치적 역학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단순한 차용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90년대 초반 일본 정계에 불어닥친 사회주의적 변화가 곧 불황의 시작이었다는 논리다.최근의 한국경제를 살펴보면 일본의 90년대와 아주 흡사하다는 게 좌원장의 판단. 따라서 일본의 자산디플레를 다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90년대 좌파정권의 득세와 최근의 우경화 조짐이 각각 경제위기의 원인과 해결책이라는 얘기다. 80년대 ‘미국 따라잡기’까지 나섰던 경제적 자신감이 90년대 전후해 부각된 정치적 패러다임 변화 때문에 사라졌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과적 평등을 중시하는 소비세와 부동산 과다보유세가 대표적인 정책실패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가진 자들의 소비억제가 자산디플레는 물론 경기불황으로 연결됐다고 봐서다.좌원장은 “한국경제 위기는 결과적 평등을 추구하는 잘못된 민주정치 탓”이라고 못박았다. 따라서 거시경제 차원에서의 진단과 처방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결과적 평등은 세상 이치와 어긋난다. 평등한 결과만 강조하는 정치 갖곤 미래가 없다. 작금의 실상은 정말 위협적(Terrible)이다. 기회균등은 보장하되 결과균등은 말이 안된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좌원장은 이 문제와 관련, 비난의 화살을 정치권으로 돌렸다. 잘못된 국가경영에 대한 질타는 계속된다.“요즘 회자되는 정책 중 새로운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80년대부터 계속 채택한 정책들이에요. 참고로 80년대는 박정희 시대와 정반대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시기죠. 전두환 정권은 포퓰리즘에 영합해 대폭적인 규제정책을 시작합니다. 경제력집중규제정책이 대표적이죠. 이런 게 노태우 정권 때 법제화되고, YS와 DJ 시절에 현실화됩니다. 노태우 정권 때의 도농ㆍ지역균형발전이나 경제 민주ㆍ선진화 정책은 노무현 정권의 정책깃발과 똑같아요. 경쟁민주화를 외치는데 말만 그럴듯하지 잘못된 정책입니다.”그렇다면 해법은 뭘까. 좌원장은 등소평의 ‘선부론’(先富論)을 끌어들였다. 기득권 청산보다는 국민 모두가 기득권을 갖도록 노력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뜻이다. 부자와 가난뱅이는 어깨동무할 수 없으며, 앞서 부자가 나가면 뒷사람은 노력해 따라잡으려는 공감대 조성이 선부론의 포인트다. 그래서 ‘소득균등과 균형적 지역발전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게 좌 원장의 생각. 정치권이 각성하고 국민적 역동성을 이끌어내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게 해법의 요지였다. 칠전팔기의 상징인 노무현 대통령 본인이 나서 “나처럼 돼라”고 주문하고 독려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자산디플레를 둘러싼 논란이 많습니다. 현실화될 가능성은 어떻게 보십니까.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정부정책 따라 달라질 겁니다. 부동산 과다보유세 신설은 나라 망하는 길입니다. 그게 바로 부유세 아닙니까. 보유세도 단계적으로 올려야죠. 거래세를 낮춰 활발한 부동산 거래를 유도하겠다고 해놓고는 아직까지도 지지부진입니다. 지금 실물자산은 모두 망가졌습니다. 주식도 마찬가지에요. 수요(투자자)가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일례로 고위공무원을 하려 해도 주식투자를 해서는 안되게 만들었어요. 그럼 공무원은 경제적인 무능력자만 하라는 뜻입니까. 지금 한국의 경제구조가 거액자산을 가진 사람은 패널티를 받게 돼 있어요.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돈 많은 사람들 골치 아프다고 난리에요. 지금으로서는 자산디플레 가능성이 충분합니다.자산디플레가 현실화된다면 어느 부문이 가장 충격을 받을 것으로 보십니까.역시 부동산이 1순위입니다. 부동산으로 돈 번 게 죄입니까. 이 사람들 정부정책을 잘 읽어 투자한 죄밖에 없어요. 정책을 잘못 써 부동산 붐을 만들어놓고 지금 와서 흔드는 건 옳지 않습니다. 물론 불법을 저지르고 세금을 안낸 투기자는 죄를 받아 마땅하죠. 투자자들이 지킬 수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또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천천히 유도해야 하고요. 공시지가를 볼까요. 시가보다 훨씬 싼 공시지가가 있는데, 세상에 어떤 사람이 시가로 세금을 낼까요. 그래놓고 공시지가에 맞춰 세금내면 뭐라고 합니다. 주식도 그래요. 자금이탈 추이를 보니 큰일 날 것처럼 난리입니다. 지금과 같은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 어떤 자산시장도 희망은 없습니다.정부와 관변 경제학자의 안일한 상황인식을 두고 지적이 많습니다.걱정입니다. 80년대 중ㆍ후반부터 GDP 증가율이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현재 거론되는 잠재성장률(약 5%)은 이 추세선의 가장 밑입니다. 문제는 내수죠. 내수만 보면 GDP는 -4~-5%예요. 그나마 수출 때문에 커버가 된 겁니다. 이런 게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안되죠. 물론 위기냐 아니냐는 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위기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호의 향후 흐름이 더 관건입니다. 저는 이런 추세를 ‘부처님 손바닥’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어디로 갈지 알아야 합니다. 국민의 50%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면 정부정책이 평균 이하라도 경제는 성장합니다. 이런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죠.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변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경제학자는 눈치를 보면 안됩니다. 경제학자라면 박정희 정권 때의 성공한 경제정책을 연구하고 또 떳떳이 밝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을 안하고 몇몇의 기술적 수치만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가장 시급히 마련해야 할 대비책은 무엇입니까.무엇보다 정치가 바뀌어야죠. 다시 제대로 된 정치를 배워야 합니다. 모든 정당이 다 마찬가집니다. 자산디플레는 어쩌면 작은 문제일지 몰라요.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되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모두 다 같이 잘 살자’는 슬로건은 잘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민주주의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할 뿐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는 박수를, 그게 아닌 사람에게는 열심히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면 됩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혼자 서세요’라는 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개별 경제주체의 자구노력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는 신용불량자 구제와 관련, 모럴해저드를 염려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방향을 제시해주신다면.스스로 도와야죠. 더 이상 정부에 손을 벌려서는 안됩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본인의 자구노력에 매진해야 합니다. 1인1표의 정치권을 의식해 상식 이상의 것을 요구하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이 잘살자는 결과의 균등은 자기오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결과를 위한 기회의 균등만 이뤄지면 그다음은 전적으로 개별 경제주체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껏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이 없었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정책에 약자보호 항목이 들어가 있습니다. 위를 끌어내리고 밑을 떠받쳐주는 그런 정책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럴해저드를 피할 수 없죠.유독 한국경제만 정체ㆍ뒷걸음질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뻔하지 않습니까. 정치가 바로서야 합니다. 남미가 불경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평등주의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에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이 문제를 깨달았지만, 아직 못 헤어나고 있습니다. 벗어나려면 정치가 변해야죠. 영국은 그걸 해냈습니다. ‘영국병’을 대처 전 수상이 치유했죠. 독일은 아직 더 지켜봐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결과의 균등은 결코 해법이 아닙니다. 기회의 균등으로 역동적 국가에너지를 소생시키는 게 한국경제의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런 잘못된 개념을 전파시킨 정치가 변해야 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불황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해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십시오.제대로 가는 나라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야 합니다. 세상 이치가 그래요. 시장경제는 만인을 부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인간사회의 논리 중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노력과 이에 따른 성취’일 겁니다. 정치적 차별은 안되지만 경제적 차별은 불가피합니다. 일하는 여부에 차별을 둬 역동성을 고취해야 합니다. 사다리의 상위 20~30%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 대접을 받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여줘야 밑에 있는 사람들도 위로 올라가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이 사다리를 눕히겠다고 난리들입니다. 차별을 둬 꾸준히 위쪽으로 올라가도록 열기를 조성해야 하는데, 이것을 막겠다는 겁니다. 세상 이치를 흔들겠다는 거죠.위기돌파를 위한 벤치마킹 대상이 있습니까.중국이 왜 되는 나라인 줄 아십니까. 에너지가 넘쳐요. 중국 인구의 절반이 본인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예요. 국민의 열기와 자신감이 국가를 뭉치게 하거든요. 우리에게도 역동성이 넘칠 때가 있었습니다. 개발연대 때 그랬고, 가까이는 올림픽을 전후해 전 국민의 70~80%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이때는 하면 된다는 정신이 충만했죠. 정치권은 지금 이런 국민정신을 되살리는 데 국가경영의 포인트를 맞춰야 합니다. 지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청산의 대상이 아닌 한강의 기적으로 반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치에 맞는 정책을 썼어요. 거의 모든 산업ㆍ개혁정책이 노력하는 자를 도와주도록 했습니다. 세상 이치에 맞았으니 경제가 발전한 건 당연했고요. 개발연대 때는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잘살기 경쟁’이 불었습니다. 약자들도 열심히 하면 사다리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죠. 지금은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하루빨리 성공국민 마인드로 몰입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