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제가 소위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복합불황 국면에서 힘차게 탈출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발표한 7월 월례 경제보고서를 통해 경제가 ‘견실한 성장’ 국면에 진입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 보고서는 “기업 부문의 개선 효과가 가계 부문으로 확대되면서 경제가 견조하게 회복되고 있다”며 낙관적 경기판단을 했다. 향후 전망에 대해서도 “국내 민간수요가 착실히 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회복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특히 “소비가 거품경제 붕괴 이후 처음으로 증가하고 있다”며 강력한 자신감을 나타냈다.일본 정부의 이 같은 자신감은 실물경제의 호전이 뒷받침됐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최근 일본의 경제성장률을 살펴보면 2002년을 바닥으로 가파른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올 1/4분기의 경우는 실질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이 연율 5.6%에 이르기도 했다.기업들의 경영실적 역시 큰 폭으로 개선되고 있으며 설비투자와 수출도 호조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0년간 ‘이제 일본에는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정도로 약화됐던 일본경제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런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한국경제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앓고 있다”고 언급하는 등 장기불황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특히 소비와 투자가 정체 내지 감소세를 나타내고 있고 앞으로의 경제전망도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일본식 장기 불황이 닥칠 것이란 시각은 갈수록 동조세력을 넓혀가는 형국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과연 어떻게 해서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 들었고 또 어떤 과정을 그쳐 이를 극복해 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증권시장서 경고 메시지일본에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이름의 장기 복합불황이 도래한 것은 한 마디로 얘기하면 일본경제가 1970~1980년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갔던 데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세계의 슈퍼파워로 떠오를 것이라며 미국의 세계 지배를 뜻하는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용어 대신 일본에 의한 세계질서를 의미하는 ‘팍스 저패니카’라는 말이 대두되기도 했었다는 사실만 봐도 일본경제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제조업은 세계를 호령했고 심지어는 미국의 기업들 사이에서도 일본식 경영기법 배우기가 붐을 이뤘다. 엔화가치는 대폭적인 평가절상을 유발한 85년의 플라자 합의에도 불구하고 초강세 기조를 꾸준히 이어갔고 일본 기업들은 강화된 ‘돈의 힘’을 바탕으로 외국기업을 사들이고 해외에다 공장을 지었다. 이때 록펠러센터 등 미국을 대표하는 빌딩과 컬럼비아영화사 같은 알짜배기 기업들이 대거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왔다. 엔화가 달러화에 버금가는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잡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고 실제 미국을 추월하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했다. 일본의 부동산가격은 면적이 수십배에 이르는 미국 땅을 모두 사들이고도 남을 정도로 치솟았고 주가도 상승일로를 줄달음질쳤다. 한 마디로 일본 앞에는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듯했고, 일본 국민들도 그런 확신에 조금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일본 경제에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90년대 접어들면서 철석같이 믿었던 일본경제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됐다. 처음으로 경고가 터져 나온 곳은 증권시장이다. 89년 12월 말 3만8,915엔까지 치솟으며 금방이라도 4만엔대에 진입할 것 같던 닛케이 평균주가가 살금살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쉬지 않고 급상승 가도를 줄달음질해 온 만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형식의 일시적 숨고르기겠거니 했지만 90년에는 3만엔선이 붕괴됐고 92년엔 2만엔선 마저 무너져 내렸다. 89년 당시 도쿄증시의 주가수익배율(PER)이 70배선에 달해 10여배 수준이던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해 볼 수도 있는 주가하락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저 ‘충격적’ 폭락일 뿐이었다.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일본경제의 급격한 추락을 예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사태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경보음이 잇따라 나온 것은 92~93년 무렵부터다. 92년 중 일본의 GDP성장률은 1.9%에 불과했다. 5~9%선의 성장률을 이어온 80년대나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유지했던 70년대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이것도 의외인데 93년에는 성장률이 0.8%로 떨어졌고 94년에는 0.4%로 더욱 악화됐다. 증권시장만이 아니라 경제 전반적으로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신호가 보다 확실해진 것이다.하지만 일본 정부와 경제계가 위기의식을 갖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부동산가격이 급격히 하강곡선을 그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해 서민들의 내집마련 꿈을 허망하게 만들었던 부동산가격은 92년부터 급격하게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주택지의 경우 도쿄권은 92년 9.1%, 93년 14.6%, 94년 7.8%가 각각 하락했고 오사카 지역은 낙폭이 더욱 커 92년 22.9%, 93년 17.1%, 94년 6.8%씩 각각 떨어졌다. 이후에도 하락세는 줄곧 이어져 웬만한 지역은 한창 때의 30~40% 수준으로 주저앉았다.상업지의 경우는 내림세가 더욱 험악했다. 도쿄나 오사카 등 일본의 핵심지역에서 무려 5년 이상이나 연속적으로 10~20%에 이르는 두 자릿수 하락률이 계속됐다. 가격이 가장 높았던 시절에 비해 5분의 1 이하 수준까지 곤두박질친 곳도 즐비했다.일본경제에 거품이 형성된 이유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은 역시 80년대 후반 일본 정부가 취했던 금융완화 정책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시각이다. 플라자 합의를 계기로 급격히 진행된 엔고(高) 행진은 일본 정부를 불안감에 휩싸이게 했다. 엔화 절상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경우 일본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이 약화되면서 경제에 불황이 닥쳐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이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재할인율을 잇달아 인하하면서 금리를 크게 낮추는 한편 통화공급을 늘리는 금융완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이에 따라 시중 유동성이 풍부해졌고 기업이든 개인이든 저금리 자금을 손쉽게 조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자금이 주식과 부동산으로 대거 몰려들면서 가수요를 유발해 급격한 가격앙등을 불렀고 이때 형성된 거품이 금융긴축정책이 취해진 90년대로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붕괴의 과정을 밟게 됐다는 것이다.어쨌든 거품 붕괴는 일본경제 전반에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왔다. 주가 폭락과 부동산가격 하락으로 국민들의 재산규모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런데 부채는 그대로이니 하루아침에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한 사람이 무수히 쏟아졌다. 내집을 마련하느라 거액의 은행융자를 동원해 주택을 구입했던 샐러리맨들의 경우는 융자금을 갚느라 허리가 휘어졌다. 심지어 폭락한 집값 때문에 주택을 처분하더라도 융자금조차 갚을 수 없어 피눈물을 쏟아내는 경우도 허다했다.기업들도 상황이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만 해도 부동산은 불패신화가 계속됐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은 부동산을 사들이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일단 사서 보유하기만 하면 값이 올라가니 상품을 팔아 버는 돈보다 부동산으로 버는 돈이 더 많은 기업들도 허다했다. 그런데 보유주식과 부동산가격이 폭락하니 회사의 자산 규모도 급격히 쪼그라들어 일본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불과 몇 년 만에 엉망이 됐다. 투자 여력이 사라진 것은 물론 은행으로부터의 차입금이 엄청난 부담이 돼 어깨를 짓눌렀다. 이는 결국 기업들의 도산사태를 불러 92년부터는 도산기업 소속 근로자수가 거의 매년 10만명을 넘었다. 이런 상황에 신규채용이 활발할 리도 만무한 만큼 실업률이 상승하고 경기침체는 더욱 가속화됐다. ‘떠오르는 태양 일본’을 상징이라도 하듯 해외 곳곳에 설립했던 공장들은 국내의 일자리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불러 실업사태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요즘 우리나라에 골프 붐이 한창이지만 일본도 버블경제 시절에는 골프 열풍이 대단했다. 너도나도 골프를 하고 회원권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접대골프를 많이 하던 기업 사정이 악화되자 골프장도 된서리를 맞았다. 회원권값이 10분의 1 이하 수준으로 폭락해 휴지조각 같은 꼴이 되는 경우가 즐비했고 도산사태를 맞은 골프장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하지만 사태가 가장 심각한 곳은 금융부문이었다. 기업과 개인 자산이 급감하면서 대출금이 대거 부실채권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대형 시중은행들은 예외 없이 수조원에 이르는 부실채권이 쌓였고 이는 금융기관마저 부실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의 상호저축은행이나 새미을금고 정도에 해당하는 중소금융기관들의 경우는 대출금의 70~80%가 부실채권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고 결국은 파산이란 최후를 맞은 케이스도 적지 않았다. 홋카이도다쿠쇼쿠 은행의 경우는 시중은행이면서도 파산사태를 맞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때문에 은행이 부실하다는 소문만 돌면 투자자들이 돈을 찾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금융기관 파산사태는 은행권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증권회사와 보험회사 역시 예외가 되지 못했다. 일본 4대 증권사 가운데 하나였던 야마이치증권은 97년 심각한 자금난이 닥치면서 자진 폐업을 신청했고 중견업체였던 산요증권도 막다른 길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또 같은해 중견 보험업체인 닛산생명보험도 파산사태를 맞았다. 전후 처음으로 보험회사까지 청산되는 사태가 생겼으니 버블 붕괴의 파급 영향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선명히 드러난다.부실채권에 금융시스템 불안 가중이런 형편에 금융시장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금융회사가 부실채권에 짓눌리며 위기에 빠지니 금융시스템의 불안이 가중되면서 심각한 신용경색 현상이 초래됐다. 때문에 일본 정부의 금융개혁이 부실채권의 신속한 정리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 회복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일본 금융계에 인수합병 바람이 몰아치면서 초대형 금융기관이 잇따라 탄생하고 수많은 기업들이 외국계 자본의 손에 넘어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방법 외에는 금융회사들과 금융시장을 정상화시키는 방법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특히 버블 붕괴 과정에서 경제 각 부문은 서로가 맞물려 부정적 영향을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 고리를 형성해 일본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국민들의 재산이 줄어드니 소비가 되지 않고, 소비가 감소하니 기업경영 사정도 한층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근로자들에게 나눠줄 몫도 줄어들고 이는 소비부진으로 다시 연결됐다. 금융회사의 경우도 부실채권이 쌓이니 더 이상 대출을 하기 어렵고, 그러다 보니 수익창출도 힘겨워져 다시 대출 여력이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물론 일본 정부가 복합불황 경제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그냥 방치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경기 회복의 불씨를 살려보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재정지출 조치를 취했고 금리를 사실상 제로 상태로 묶어두는 초저금리 정책을 계속했다. 하지만 재정적자만 더욱 심화시켰을 뿐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버블경제의 붕괴에 따른 경기위축현상이 그만큼 심각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일본 정부가 불황탈출을 공식 선언한 것은 일본경제가 이제는 이런 악순환 고리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불황을 탈출하는 데 10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이 기간에 일본 기업 및 금융회사들은 구조조정과 부실채권 정리에 안간힘을 다했다.제조업체들의 경우는 인원감축과 한계사업정리 등을 과감히 실시함으로써 기업체질 강화와 비용절감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구조조정을 뜻하는 영어단어 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리스트라’라는 단어가 일반적 용어로 굳어지기도 했다. 또 금융회사들은 보유 부실채권 규모를 대폭 줄였고 앞으로 3년만 더 지나면 부실채권 문제에서 완전 해방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일반적이다.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일본경제가 악순환의 고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제조업의 강력한 경쟁력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는 점이다. 과도한 거품 때문에 긴 고통을 겪기는 했지만 일본 제조업체들의 탁월한 기술 수준과 높은 생산성은 불황 가운데서도 거의 손상되지 않았고 금융시장을 비롯한 경제가 안정 기미를 보이자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다는 것이다. 10년간의 힘든 구조조정이 경쟁력을 오히려 더욱 강화시키는 보약이 됐다고 이야기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다시 진군의 나팔을 불기 시작한 일본경제의 움직임은 제조업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