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하는 이모씨는 최근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5년 전 현직에서 은퇴를 한 후 퇴직금과 그동안 저축한 예금의 이자로 생활을 꾸려왔지만 더 이상 금리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 더욱이 지난해 큰딸의 결혼으로 예금액이 2,000만원 줄어든 상태다.“은행 관계자와 상담을 해봤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더군요. 상대적으로 이자가 높은 상품이라 해도 이자가 5% 내외에 불과하니까요. 증권투자를 생각해 봤지만 경험이 없어 불안하고요. 은행 이자로 노후를 보내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 셈입니다.”최근 한국은행은 이씨와 같은 금리 생활자에게 충격적인 자료를 발표했다. 은행에 예금을 하면 수익은커녕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내용이었다.한국은행은 올 1분기 정기예금의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0.42%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했다. 1억원을 1년간 예금해 두면 실제로 연 42만원을 까먹는 꼴이 된다는 의미다. 정기예금의 이자율이 평균 4%에 육박하기는 하지만 이자에 대한 세금(16.5%)과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는 분석이다. 자료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정기예금 실질금리는 99년 이래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99년 5.09%에서 2001년 0.46%로 곤두박질쳤다가 2002년 1.24%로 잠깐 상승했지만 다시 떨어지기 시작해 지난해부터 마이너스 금리를 이어가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실질금리가 상승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우선 시중은행들이 정기예금의 명목 이자율을 점진적으로 내리고 있다. 지난해 말 4.24%였던 정기예금 이자율은 지난 6월 현재 3.81%로 내려선 상태다. 지난 1년간 콜금리가 3.75%로 동결된데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돈을 굴릴 곳이 마땅치 않아 이자율을 낮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최근 들어 물가가 오르고 있어 실질금리는 더욱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7월 소비자물가는 전월에 비해 0.6%포인트,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4.4%포인트 올랐다. 장마와 폭염으로 농축수산물 가격이 뛴데다 버스와 지하철요금 등이 일제히 올랐기 때문이다.문제는 물가 상승폭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물가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국제유가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8월4일 현재 텍사스 중질유는 배럴당 42.76달러를 기록했고 북해산 브랜트유가 43.02달러에 이르렀다. 특히 국내 원유 소비량의 70%를 차지하는 중동산 두바이유 가격은 90년 걸프전 이후 최고치인 37달러를 뛰어넘어 물가상승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일반적으로 원유가격이 1달러 오르면 물가는 0.1%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질금리는 물가상승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는다. 물가가 0.1% 오를 때마다 실질금리는 0.1% 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원유가격이 1달러 오르면 실질금리는 0.1% 감소한다.이번에 한국은행이 발표한 실질금리 동향은 지난해 물가상승률인 3.6%를 기준으로 추정된 것이다. 하지만 원유가 상승으로 올 물가상승률은 4%대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실질금리 역시 큰 폭으로 떨어질 것이 확실시된다. 물가상승률이 4%면 실질금리는 -0.42%에서 -0.82%로 내려선다. 1억원을 1년 예치해 두면 82만원을 손해보게 되는 것이다.시중은행의 실질금리 하락은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2003년 말 현재 국내 금융자산은 1,031조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57.2%는 예금과 현금 등 현금성 자산이고 채권이나 투자신탁, 주식 등 투자성 자금은 16.3%에 불과하다. 따라서 실질금리 하락은 국민들의 실제 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분석이다.은행예금이 더 이상 효과적인 재테크 방법이 되지 못하자 은행을 빠져나가는 자금이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에만 3조4,435억원이 은행권을 이탈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2조7,000억원이 유입된 것과 크게 대비되는 결과다.한국은행측은 “부가세 납부를 위한 예금인출이 많은데다 정기예금뿐만 아니라 적금, 상호부금, 주택부금 등 은행권의 저축성 예금상품의 이자율이 3%대로 고착된 결과 투자신탁 등 수익성이 높은 금융상품으로 자금을 이동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실제로 지난 7월 현재 투신권의 머니마켓펀드(MMF) 잔액은 지난해 말 42조520억원에서 15조7,170억원 증가한 57조7,690억원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외화예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시중은행의 금리보다 적게는 0.5%포인트에서 많게는 1%포이트 가량 이자율이 높기 때문이다. 외화예금 잔액은 지난 6월 현재 214억5,000만달러로 지난해 155억달러보다 38.4% 증가했다. 특히 일본 엔화예금이 급증하고 있다. 6월 현재 61억9,000만달러로 전년 대비 88%나 상승했다고 한국은행은 밝혔다.자금이 해외시장으로 빠져나가면서 자본수지 적자도 크게 늘었다. 우리나라의 자본수지는 2001년을 제외하면 99년 이후 줄곧 흑자기조를 유지해 왔다. 그러던 것이 지난 5월 16억5,000만달러의 적자로 돌아섰고 6월에는 적자폭이 더욱 늘어나 적자액이 22억1,500만달러에 이르며 2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특히 6월의 경우 경상수지 흑자가 22억2,000만달러여서 수출로 번 돈이 고스란히 해외로 빠져나간 셈이 됐다.외화예금이 늘고 있는 반면, 국내 은행의 저축률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98년 개인저축은 국민총처분가능소득의 19.9%를 차지했다. 하지만 4년 연속 내리막길을 걸어 2002년에는 4.7%에 불과했다.저금리로 인한 국부유출과 자금의 단기유동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당분간 금리인상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콜금리를 더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경제의 유일한 성장동력인 수출마저 성장이 둔화되는 마당에 금리를 더 내려 내려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금리인상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목소리도 적잖다. 최근 대우증권은 콜금리를 인하할 경우 시중자금의 단기 부동화가 더욱 심해지는 반면, 기업의 설비투자 유발 효과는 적을 것이므로 오히려 금리인상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금융통화위원회도 지난 7월 하반기 물가상승을 우려하는 내용의 발표를 해 금리인상의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다.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콜금리 변화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미국의 금리인상 등 국제적인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