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포수 5만개, 연매출액 70조원 돌파 … 제조업체들 '잘보이기 경쟁'

편의점의 원조는 미국이지만 꽃을 피운 나라는 일본이다. 수적으로 엄청나게 많은데다 고객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 ‘편의점 천국’으로 불릴 정도다. 최근 들어 일각에서는 ‘향후 은행을 이기는 날이 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일본의 편의점 역사는 30년 전인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븐일레븐이 1호점을 내며 유통업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후 많은 업체들이 새로 뛰어들며 파워를 키워나갔고, 이제는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든 상태다.일본의 편의점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원동력은 고객을 모이는 집객력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물건이 엄청나게 팔리다 보니 제조업이나 유통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실제로 연간 매출액을 보면 지난해 기준으로 7조엔을 돌파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93년의 3조9,000억엔대와 비교하면 10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점포수의 증가도 폭발적이다. 93년 2만3,000여개였던 것이 지난해 4만개를 넘어 전국 방방곡곡에 편의점 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이 수치는 일본편의점협회가 집계한 것으로 협회 자료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추산되는 1만여개를 포함시킬 경우 그 수는 5만개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편의점을 찾는 고객 역시 엄청나다. 상위 10개사의 고객을 합칠 경우 하루 3,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특히 업계 1위인 세븐일레븐의 경우 하루 954만여명이 들러 국민 10명 가운데 거의 1명꼴로 매일 물건을 사간다는 통계도 있다.이 같은 놀라운 집객력은 일본의 유통구조와 생활양식을 뿌리부터 변화시키고 있다. 예컨대 아사히맥주의 ‘슈퍼드라이’를 보면 다른 유통망을 제치고 세븐일레븐에서 팔리는 양이 가장 많다. 잡지 <주간 소년매거진>이나 코카콜라 역시 세븐일레븐이 넘버원이다.이유는 간단하다. 고객들이 맥주나 잡지, 또는 콜라를 사기 위해 일부러 양판점이나 서점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맥주도, 잡지도 집 근처 편의점에서 사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양판점이나 담배판매점이 설자리를 잃고 문을 닫는 사례가 크게 증가한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서점업계 내에서 위기감이 커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편의점은 위력은 상품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각종 서비스에도 그대로 미친다. 예를 들면 전기나 수도 등의 공공요금 수납이다. 통계를 보면 연간 약 7억건을 처리해 전체의 70%를 담당하고 있다.이 경우 편의점은 전력회사와 전화회사로부터 1건당 50~100엔 정도의 수수료를 받는다. 건당 수수료는 많지 않지만 워낙 많은 건을 처리하다 보니 수수료 수입만 연간 250억엔에 이른다. 공공요금 수납대행만으로 웬만한 상장기업 뺨치는 수입을 올리는 셈이다.하지만 공공요금 수납대행도 서비스의 일부에 불과하다. 최근 들어서는 편의점용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ATM을 설치한 편의점이 이미 1만개를 넘어섰고, 전국의 은행 지점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높은 수수료 등 몇가지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앞으로는 돈을 찾는 장소도 편의점으로 바뀔 것이 확실해 보인다.구체적으로 은행을 찾는 고객은 하루에 130만명 수준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100만명 이상은 ATM 이용자다. 이들의 절반만 편의점을 이용한다고 해도 미래는 뻔하다. 더욱이 편의점은 접근성에서 은행을 압도한다. 일찍이 양판점이나 담배판매점이 고객을 편의점에 빼앗겼듯이 은행 역시 몇 년 후에는 밀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일본 편의점의 점포당 면적은 약 30평 규모. 이 공간에 약 3,000종류의 상품이 진열된다. 보통 매주 화요일마다 상품을 교체하고 그때마다 약 200종류의 신상품이 등장한다. 물론 같은 수만큼의 상품은 사라진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상품회전이 빠르기 때문에 1년 내내 살아남는 상품은 3,000종 가운데 30%가 안된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상품구색이 계속 바뀌는 점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 크게 기여한다. 고객들의 경우 단순히 이용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편의점을 찾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사고 싶은 상품이 거기에 있어서 들르는 것이다. 또 다른 곳보다 유난히 상품의 교체가 잦아 고객 입장에서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도 제격이다.편의점에서만 살 수 있는 상품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가오의 ‘헤르시아 녹차’다. 체지방 개선에 좋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난해 5월말 발매 이후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올 3월까지 약 1억개 이상이 팔려나간 것으로 집계된다. 또한 세븐일레븐은 PB(프라이빗 브랜드) 상품비율이 이미 50%를 넘었다. 세븐 일레븐 매장에 깔려있는 상품의 둘 가운데 하나는 다른 데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상품이나 서비스 외에 편의점에는 고객을 끌어들이는 무기가 또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지만 편의점의 잡지매장은 ‘서서 책 읽는 것’을 크게 환영한다. 잡지매장을 길가 창문 쪽으로 배치해 서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일부러 밖에서 보이게 한다. 점포 안에 사람이 보이면 지나던 사람 역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점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편의점의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남다른 노하우는 대기업조차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덩치가 훨씬 큰 기업들도 편의점에 잘 보이기 위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전개할 정도다. 특히 고객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편의점의 파워는 점점 늘어만 가는 모습이다.편의점 매출의 12%를 차지하는 음료를 예로 들어보자. 편의점의 표준적인 음료 진열은 냉장고 3개 칸으로 약 190개의 병과 캔이 들어간다. 그런데 첫째주에 20병 이상 팔리지 않으면 바로 밀려난다. 자연 업체들 사이에 좀더 나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편의점에서 밀려나면 매출에 큰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막대한 판촉비를 쓰고 가격인하도 마다하지 않는다.인지도에서 밀리는 기린음료나 일본담배산업(JT)이 최근 들어 코카콜라나 산토리와 나란히 진열대를 확보할 수 있는 비결도 막대한 판촉비를 쓰고 가격정책도 탄력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음료 메이커의 편의점 상대 판촉비는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업계 정상인 코카콜라의 경우 연간 약 40~50억엔대로 추산된다. 여기에다 편의점이 TV광고를 할 때 이들 음료업체에 비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 실제 음료업체 입장에서 편의점을 통해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아이스크림업계는 더욱 심하다. 94년부터 10년간 시장은 약 1,000억엔이나 축소됐다. 반면 편의점 의존도는 26.2%에서 43.5%로 크게 상승했다. 그런데 편의점 대상 납품가격은 심하게는 정가의 40%밖에 안된다, 100엔짜리 아이스크림을 40엔에 공급하는 것이다. 하겐다즈 등 일부의 메이커를 제외하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셈이다. 하지만 업체들은 편의점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편의점의 집객력은 마약같이 고객과 제조업체를 끌어당긴다. 특히 95년에는 대형 편의점 업체들이 재차 대대적인 출점경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집객력과 지배력 면에서 편의점의 위상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