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여파로 중산층 이하 소비력 바닥, 쓰고 싶어도 쓸 돈 없어

여기저기서 불황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올 하반기를 기대했지만 상황이 나아질 조짐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의 성장 사이클대로라면 경기가 살아날 때가 됐지만 각종 경기지표들은 온통 빨간색 투성이다.올 초부터 2/4분기 이후 경기회복을 낙관해 온 정부 역시 냉엄한 현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다. 급기야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최근 경제장관 간담회에서 “우리 경제가 좀처럼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제전문가들도 수출은 늘고 있지만 내수로 연결되지 않아 불황이 장기화될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며 크게 우려하고 있다.활력을 잃은 내수의 현주소는 수치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5월 중 산업활동 동향을 보면 소비의 척도인 도소매판매는 지난해보다 2.2% 감소했다. 지난 1월(마이너스2.5%) 이후 4개월 만에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다. 설비투자는 두 달 연속 감소세에서 탈피했지만 증가폭이 1.3%로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또 건설수주도 지난해 대비 24% 크게 감소하는 등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특히 건설경기 추락은 그동안 내수를 받쳐 왔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이밖에 5월 소비자전망 조사에서도 6개월 후의 소비자기대심리를 나타내는 소비자기대지수(지수의 기준은 100. 소비를 늘리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100을 넘고 줄이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100보다 낮아진다) 역시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2/4분기쯤 내수회복을 기대해 온 기업들 입장에서는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다. 당분간 내수부진에 시달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다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나마 기업들이 가장 큰 기대를 거는 것은 역시 고소득층이다. 경기가 부진하지만 여전히 왕성한 소비력을 과시하는 까닭이다. 특히 소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믿을 것은 오로지 부자들의 명품수요밖에 없다는 인식이 크게 확산되는 추세다.물론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백화점의 큰손 고객들이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1,000만원어치 이상을 구입한 고객은 3만8,627명으로 전년(3만6,275명)에 비해 6%로 증가했다. 현대백화점도 연간 3,000만원 이상 구매한 고객수가 지난해 4,500명으로 전년에 비해 50%나 늘어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역시 지난해 기준으로 연간 3,500만원 이상을 구매한 최우수 고객수가 전년보다 22%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백화점의 명품판매 역시 불경기 속에서도 증가하는 추세다. 고소득층의 씀씀이 덕분이다. 올 들어 5월까지 롯데백화점 전체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 줄었지만 명품매출은 오히려 2.1% 늘었다. 신세계백화점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월 9.4%, 3월 5.2%, 4월 17.5%, 5월 2.5% 등 꾸준한 신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롯데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불황 속에서도 명품판매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경기가 전반적으로 어렵지만 명품매출은 IMF 외환위기 때도 상승세를 이어갔던 만큼 당분간 지금의 추세가 꺾이지는 않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신용카드 이용액을 봐도 소비 양극화는 대세로 자리잡은 모습이다. 여신금융협회가 복수카드 소비자(4개 이상의 카드를 소지한 사람) 1,010만3,578명의 4월 카드 이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1인당 신용카드 사용액은 줄고 있지만 1,000만원 이상 고액 소비층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자료를 보면 1인당 평균 이용액은 69만원으로 지난해 4월(73만원)보다 5.7% 감소했다.반면 이용액 1,000만원 이상인 회원의 사용액은 1인당 평균 1,561만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4월의 1,479만원과 비교해 5.5% 증가한 것으로 고소득층의 소비력을 짐작케 한다. 여신금융협회측은 “이번 조사를 보면 큰손들의 씀씀이는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소비양극화가 심화된데다 카드사들이 앞다퉈 부자들을 상대로 한 마케팅을 전개한 결과로 풀이된다”고 강조했다.수입차의 상승세도 예사롭지 않다. 경기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해에 비해 두 자릿수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가 올 1~5월까지 집계한 판매현황을 보면 8,525대를 팔아 지난해의 7,819대보다 9%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 윤대성 전무는 “수입차는 불황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고소득층의 특성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구입하는 특성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가전분야에서도 부자들의 소비패턴을 읽을 수 있다. 일단 업계에서는 최근의 가전 수요를 알뜰족과 명품족으로 양분해 파악하고 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가격이 아주 싸거나 웰빙형 고가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로 명확하게 나눠지고 있다는 것이다.구체적으로 복합전자유통단지인 테크노마트에 따르면 에어컨의 경우 음이온, 살균, 탈취에 비타민 발생 등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고가형이 불황에도 불구하고 잘나가고 있다는 것. 테크노마트측은 “고가 제품 판매액이 지난해보다 10% 정도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하이마트의 판매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저가 제품은 지난해와 비교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고가 제품은 약 20%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강남 등 고소득층이 밀집된 지역을 중심으로 고가품 판매량이 늘고 있다는 것. 전체적으로 부자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는 제품의 판매는 양호한 편이다. 여기저기서 죽는다고들 아우성치지만 부자를 상대로 서비스를 하거나 상품을 파는 업체들의 표정은 느긋하다. 한동철 서울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불황기에도 명품의 위력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며 “이런 트렌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부자 고객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업체들의 타깃도 변화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자 가운데서도 최상위층에 포커스를 맞춰 마케팅을 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예전에는 상위 20% 이내 고객을 집중공략했다면 요즘 들어서는 이를 상위 5%로 수정하는 식이다.최근 국내 굴지의 한 백화점이 고객들의 구매력을 비교해 본 결과 상위 5%의 고객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4%에 달했다는 결과도 나와 있다.이제 부자마케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부자를 잡지 못하곤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산층이 붕괴된 만큼 기업들 입장에서 ‘실탄’이 풍부하고 소비력이 왕성한 부자들은 공략대상 1호임에 틀림없다.다만 기업들 입장에서 부자라고 모든 것을 다 사준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나름의 소비패턴이 있는 만큼 이를 철저히 활용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특히 부자들은 특성상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기업들이 부자들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이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부자들에게 일반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마케팅 기법을 그대로 썼다가는 공략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