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한국의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노후보장시스템으로 사회보장연금(Social Security)제도가 있다. 65세 이상의 노인과 그 가족 및 장애인들에게 은퇴 후 생활을 꾸려갈 수 있도록 연금을 지급하는 시스템이다. 이 연금을 타기 위해서는 사회보장세금을 내야 한다.한국에서는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지만 사회보장연금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인식은 편안한 노후를 가능케 하는 도우미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3~4년 후 은퇴를 앞두게 되면서 연금 지급액이 세금 징수액보다 많아짐으로써 생기는 연금 재정 고갈 우려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연금 지급 연령를 늦추거나 세금 징수액을 높이는 문제 등 연금 재정 확충 방안이 미국에서도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미국에서 사회보장연금이 탄생한 것은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공황 직후의 일이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미국에서도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가족농장이 파괴됨으로써 노인 봉양을 자식들에게 의존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후 닥친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노후대책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같은 상황을 우려해 사회보장연금제도를 만들었다.사회보장연금의 재원은 근로자와 기업이 각각 급여의 6.2%를 세금으로 내 조달된다. 자영업자는 소득의 12.4%를 사회보장세로 낸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연금재원, 이른바 사회보장연금 적립액은 지난해 말 현재 1조5,308억달러에 달한다. 지난해의 경우 세금으로 6,319억달러를 거둔 반면, 연금 지급액과 경비를 포함한 지출액은 4,791억달러였다. 받은 돈이 지급한 돈보다 많기 때문에 연금 적립액은 늘어나고 있는 것.하지만 미국사회에도 노령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연금 증가는 중단될 위기에 빠졌다.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은 현재 13%이지만 2030년에 20%로 늘어날 전망이다. 노령화가 일본보다 더디지만 기금운영 면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것이다.게다가 7,700만명에 달하는 베이비붐 세대가 3~4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은퇴한다. 이들에게 지금처럼 연금을 지급할 경우 수입액이 지급액을 초과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연금 증가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노동인구 증가율도 뚝 떨어질 전망이다. 노동인구 증가율은 현재 1%이지만 30년 후에는 절반으로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사회보장세를 낼 수 있는 인구가 급감한다는 뜻이다.사회보장기금이사회의 추정에 따르면 이러한 인구변화 추세라면 2018년부터 수입액보다 지출액이 많아지고 2042년에는 연금이 고갈될 전망이다. 연금이 고갈된다면 재정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지만 미국의 재정상황도 최악이다. 부시 대통령의 세금감면 정책으로 올해 재정적자가 5,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될 만큼 나라살림에 구멍이 뻥 뚫려 있다. 나라살림에서 사회보장연금에 돈을 넣어줄 형편이 못된다.2042년 연금 바닥날 가능성이처럼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연금제도 수술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수술론의 기수로 나섰다. 그린스펀 의장은 이미 80년대 초부터 연금 재정의 위기 가능성을 경고했다. 최근에는 의회 증언을 통해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현시점에서 연금제도를 손대지 않을 경우 나중에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그린스펀 의장이 제시한 안은 지급액을 줄이고 지급 연령을 높이자는 것이다. 현재 사회보장연금은 물가에 연동돼 있다. 물가상승률만큼 연금액이 매년 오른다. 그린스펀 의장은 연금을 높이는 변수인 물가상승률을 낮춰 실질적인 지급액을 줄이자고 제안했다.또 하나는 65세인 연금 지급시기를 노령화 추세에 맞춰 높이자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연금 지급은 65세, 정확하게 말하면 65세 4개월이다. 20년 후에 67세로 높아지고 그후에는 멈추지만 그린스펀 의장은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해 노령화 속도에 맞춰 지급시기를 늦춰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경우 사회보장세를 높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사회보장기금이사회에서도 앞으로 75년간 재정 안정을 위해서는 사회보장세를 1.89%포인트 높이거나 연금 지급액을 12.6% 감축할 것을 제안했다. 또 일반회계에서 3조7,000억달러를 지원할 것도 주장했다.이 같은 주장에 대해 찬반양론이 거세다. 연금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찬성론이 있는 반면, 부시 대통령이 무분별한 재정지출로 나라살림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재정건실화부터 추진해야 한다는 반대도 만만치 않다. 오는 11월 대통령선거에 영향을 미칠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미국 국민들에게 사회보장연금은 노후생활의 튼튼한 버팀목이자 동반자이다. 65세 이상 노인 중 90%가 연금을 받고 있다. 그들이 받는 소득 중 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39%에 달한다. 연금이 소득의 절반을 넘는 노인도 3분의 2나 된다. 특히 22%는 연금이 유일한 소득원이기도 하다.평균 지급액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지난해 노인, 유가족, 장애인 등 총 4,700만명이 4,708억달러를 받았다. 노인의 경우 월평균 922달러를 받는다. 100만원 조금 넘는 액수이지만 연금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노인이 22%나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금은 노후생활의 안전판이나 다름없다. 생긴 지가 70년이나 돼 사회보장세 납부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노후생활을 가능케 하는 생존수단이기 때문에 제도 수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사는 대단하다.사회보장연금과 관련, 노령화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인한 기금 고갈 문제와 함께 운영방식도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현재 사회보장연금 재원은 사회보장신탁펀드에서 운용하고 있다. 법에 따라 원리금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미국 국채에 투자하게 돼 있다. 위험자산에는 투자할 수 없다.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이 재원운영을 부분적으로 민영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일부 재원은 세금을 낸 개인이 자신의 개인 계좌를 활용해 투자토록 허용하자는 것이다. 운용방식의 민영화를 통해 수익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지금처럼 안전하면서 수익률이 낮은 국채에 투자하기보다 개인 성향에 따라 좀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주식투자 등을 가능케 하기 위해 부분적이나마 민영화를 하자는 게 부시 대통령의 제안이다.이 같은 제안은 적잖은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민영화를 통한 자유로운 투자가 자칫하면 위험한 투자로 이어져 노후생활의 안전판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주식시장이 침체를 보일 때 이 같은 민영화론에 대한 반대가 더욱 거세다.미국의 사회보장연금은 한국의 국민연금처럼 총체적 불신을 받고 있지 않다. 하지만 기금 고갈 우려와 민영화 여부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뜨거운 감자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