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시타전기는 지난 5월18일 일본 중부 효고현 오마가사키시에 약 1조원을 투자, 세계 최대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새 공장이 완공되는 2007년 4월이면 마쓰시타전기의 PDP 생산능력은 현재의 약 4배인 연간 450만장 수준으로 늘어난다. 2위인 한국 삼성SDI와 1위인 후지쓰히타치를 제치고 세계 정상으로 도약하게 된다.파이오니아도 오는 9월 야마나시현에 플라즈마 패널 새 공장을 완공하고, 후지쓰히타치는 내년 말 미야기현에 새 공장을 준공한다. 디지털가전의 주력부품으로 수요가 급증하는 세계 PDP시장을 석권하기 위해 일본 메이커들이 국내에서 설비투자 경쟁을 펼치고 있다.PDP뿐만이 아니다. 전기전자 메이커들은 최근 반도체공장을 일본 내에 다시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자동차업체들도 공장을 만들거나 라인을 증설하고 있다.2000년 이후 설비투자를 주저해 왔던 일본 제조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설비투자에 나서고 있다 .특히 올 들어 저가제품을 중심으로 한 생산기지 해외이전 붐은 한풀 꺾인 대신 국내에 새 공장을 착공하는 ‘U턴 전략’이 뚜렷해져 눈길을 끌고 있다.이처럼 국내투자가 늘고 있는 것은 일본 제조업계의 전통인 ‘혁신과 경쟁’이 다시 빛을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액정TV, 디지털카메라 등 고부가 첨단제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 글로벌 시장 창조에 성공하자 자신감을 되찾은 것으로 판단된다.업계 전문가들은 일본 기업의 강점인 제조기술과 첨단 과학기술이 융합한 ‘사이언스형’ 고부가 제품들이 잇달아 히트를 치면서 제조업체들이 경쟁력을 회복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일본은 전통적 제조업인 철강, 자동차, 정밀기기, 전자기기 등 4개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한다. 게다다 새로운 차세대 디지털제품에서 압도인 우위를 차지, 기업 전체 수익성이 대폭 좋아졌다는 분석이다.실제 일본 기업들은 2003회계연도(2003년 4월~2004년 3월 말)에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 대표주자인 도요타자동차가 지난해 생산대수에서 미국 포드자동차를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섰다. 또 순익은 1조1,000억엔을 넘어 일본 기업으로는 최초로 1조엔을 넘기는 신기록을 세웠다. 주요 상장기업들은 2003회계연도 결산에서 순익이 전년 대비 70% 증가, 사상 최고 기록을 세운 것으로 나타났다.이들 기업은 늘어난 수익을 과감하게 설비투자에 쏟아붓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 5월17일 실시한 2004회계연도 설비투자 조사에서도 제조업 설비투자액은 전년 대비 10.1% 늘어난 11조4,927억엔에 달했다. 9년 만에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업종별로 보면 17개 중 무려 15개 업종에서 올해 설비투자를 늘릴 것으로 조사됐다. 초박형 TV 및 디지털카메라의 부품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전기전자업체들의 설비투자는 18.3%나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체별로는 반도체공장을 새로 짓는 후지쓰히타치의 경우 투자액 증가율이 47.2%에 달해 가장 높았다.일본 제조업체들이 경쟁사들과 손을 잡은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진 반도체 및 액정패널 관련 신규 프로젝트에서 메이커들이 경쟁사와 제휴, 공동투자를 통해 한국이나 중국업체를 따돌리기 위한 전략이다.일본은 90년 초 버블붕괴 이후 제로(0) 성장을 하는 역경 속에서도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를 확대, 디지털 기술 강국의 초석을 만들었다. 일본의 연구개발비는 87년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2.72%로 미국(2.6%)을 제친 후 지금까지 우위를 지키고 있다. 2000년대에는 격차가 1%포인트 이상 벌어졌다.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최근 향후 디지털 시장의 승패는 연구개발력이 뛰어난 업체와 그렇지 못한 업체간에 우열이 갈릴 것으로 전망했다.마쓰시타, 소니 등 일본을 대표하는 업체들은 연구개발비가 설비투자비보다 많은 ‘개발형’ 메이커로 향후 디지털 시장을 리드해 나갈 것이라는 분석이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연평균 3,000억엔 이상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한 업체는 세계에서도 10여개에 불과, 이들 메이커가 결국 미래 시장을 선도할 것으로 예측됐다. 특히 일본 기업들은 연간 4,000억엔 이상을 투자, 연구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가 10위권에 포함됐다.히토쓰바시대학의 오다기리 히로유키 교수는 “일본은 지속적인 이노베이션을 통한 기술 축적으로 차세대 핵심산업에서 미국이나 유럽을 누를 수 있는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기초 위에 구조조정으로 수익성이 좋아진 일본 제조업체들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서 일본 경기회복을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다.기업들의 순익 호전으로 소비심리도 살아나 경기회복 속도에 탄력이 붙는 양상이다. 일본 내각부가 5월18일 발표한 GDP 성장률도 정부 예상을 크게 웃돌았다. 올 1분기 GDP는 전기보다 1.4%(연율로는 5.6%) 증가했다. 이는 8기 연속 플러스 성장으로 일본이 13년에 걸친 장기불황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뜻한다. 실질성장률 5.6%는 같은 기간의 미국 4.2%보다 높은 수준이다.일본의 축적된 과학기술과 자본력, 그리고 기업들의 본격적 설비투자가 지속돼 일본 경제는 장기불황에서 탈피하고 있다. 기업들은 이미 10여년 이상 계속됐던 패배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산업 주도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5월 초 실시된 내각부의 ‘기업행동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경쟁력이 3년 전보다 강해졌다’고 대답한 업체수가 ‘약해졌다’는 업체수보다 훨씬 많았다. 또 일본 경제나 회사 수익 전망에 대해서도 연초 예상치보다 상향조정, 낙관적 시각을 드러냈다.일본 정부도 지난주 2010년 신산업 프로젝트를 통해 제조 대국 일본의 부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일본 경제를 이끌 신산업으로 정보가전, 연료전지, 로봇, 콘텐츠(애니메이션 및 영화), 건강복지, 환경에너지, 비즈니스 지원 등 7개 산업이 꼽혔다. 정부는 현재 200조엔 규모인 이들 산업의 규모를 6년 안에 300조엔으로 키워 일본 경제의 성장축으로 삼는다는 계획이다.최근 상용화 단계에 접어든 로봇산업의 경우 일본은 ‘인간형’ 로봇 제품에서 미국, 유럽을 제치고 기술적으로 앞선 상태다. 혼다가 97년 세계 최초로 두 발로 걷는 인간형 로봇을 개발했으며 소니, 미쓰비시중공업, 도요타자동차 등도 잇달아 신제품을 개발, 세계시장을 리드하고 있다.로봇 제품의 기술력 척도가 되는 특허출원 건수에서도 일본은 최근 10년간 1만4,500건을 출원해 유럽(1,900건), 미국(1,000건)과 비교,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세계 로봇시장은 지난 2000년 6,100억엔 규모에서 2025년에는 7조엔대로 급팽창, 유망 시장이 될 것으로 일본 경제산업성은 예측했다.이밖에 일본은 유기EL, 탄소소재, 리니어모터카, 연료전지, 생체인증시스템 등 다양한 첨단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 차세대 산업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 정부와 민간기업들은 첨단기술을 기반으로 대규모 투자를 통한 상품화에 착수, 10년 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사회시스템 디자이너로 활약 중인 요코아먀 요시노리씨는 “일본은 강한 경제, 선진적 기술, 그리고 대중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 강대국으로 생존할 것”이라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