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기 의결권 행사 공시 지난해보다 33.5% 증가…2002년 이후 상승세

‘고개 숙인 기관투자가? NO!’최근 불안정한 증시상황 속에서 기관투자가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 가운데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기업의 주주로서 기관투자가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추세다.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지난 3월 SK(주) 주주총회에 전 매스컴이 주목했다. 1년여간 끌어온 SK와 소버린자산운용의 대결구도가 일단락되는 자리였기 때문. 지난해 3월 소버린자산운용의 SK(주) 지분매집으로 시작된 대결양상은 SK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결국 SK측이 주주들의 표심을 잡아냄으로써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여기에 큰 몫을 해낸 주체가 바로 기관투자가들이다. 막판 주총을 앞두고 의결권 행사 공시를 낸 투신운용사, 뮤추얼펀드, 은행 등 기관투자가들이 SK측 지지 입장을 밝혔다.3.6%의 지분을 갖고 있던 국민연금관리공단 역시 정관변경안을 제외한 사외이사 선임 등 나머지 안건에 대해 모두 SK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이 같은 기관투자가들의 입김은 올해 초 국민은행 주식을 보유한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공시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기관투자가들은 국민은행의 임원 선임, 정관변경 등에 대해서는 반대의사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투자신탁운용의 경우 임원진에 대한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부여 건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혔다.지난해 초 포스코의 경우 주총을 앞두고 유상부 회장 유임 여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당시 그의 운명을 가른 것 역시 기관투자가의 힘이었다. 유 전 회장은 이사회에서 이사후보로 재추천됐지만 기업은행, 대한투자신탁운용 등이 연임 반대의사를 밝히고 투서와 구설에 시달리면서 스스로 물러났다.기업도 IR강화로 대응이처럼 기관투자가들이 주주로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게 사실 오래된 일은 아니다. 지난 2002년 9월 증권투자신탁업법이 개정되면서부터 기관투자가들이 주주로서 제 역할을 찾기 시작했다. 개정 법률에 따라 기관투자가들은 펀드별로 10억원 이상 또는 운용금액의 5%이상 주식을 보유한 기업에 대해 주총 5일 전 의결권 행사결과를 공시할 의무가 있다.지난 97년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기업지배구조의 부실이었다. 그간 우리나라 기관투자가들은 합병이나 영업양도 등을 제외하고는 투자대상 기업의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없었다. 국내기업의 기업지배구조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참여연대와 같은 비정부기구(NGO) 정도가 전부였던 셈이다. 당연히 기관투자가들이 주총에서 반대의견을 내는 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주식시장에서 기관투자가의 소유비율이 시장 감시기능을 할 만큼 높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현실 속에서도 2002년 증권투자신탁업법 개정을 계기로 기관투자가에게 시장감시자의 역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실제로 지난 3월 증권거래소 발표에 따르면 기관투자가가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시한 건수가 전년 대비 30% 이상 높아졌다. 또 주총안건에 대한 반대의견 비율은 아직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1.46%로 지난해 0.78%에 비해 다소 늘었다.반면 찬성비율은 지난해(95.61%)보다 다소 줄었지만 94.83%로 여전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기관투자가들이 주주로서 소신 있는 의견을 펴는 것이 아직 현실화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올해 초 한국투자신탁운용, 동원투자신탁운용 등이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히는 등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한국투신은 올해 초 지분보유 기업에 대해 경영질의서를 보낸 뒤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경영개선을 요구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투신은 국민은행뿐만 아니라 하나ㆍ신한지주ㆍ외환ㆍ조흥은행의 스톡옵션 안건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나타냈다.신긍호 한국투신 주식전략팀장은 “스톡옵션은 향후 이익이 나아진다고 볼 때 부여하는 것”이라며 “은행은 현재 비정상화 수준에서 정상화로 좋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스톡옵션 운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반대의 이유를 설명했다.여기에 관계투자를 강화하는 것도 최근 기관투자가들의 변화상 중 하나다. 반대의사를 밝히는 것 이외에도 관계투자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투자는 기관이 경영진과 장기적 관계를 맺고 우호적 투자자로서 정보를 수집하고 감시를 병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주요기업의 기업소개(IR)담당자들은 최근 이런 분위기를 실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 이동통신회사의 IR관계자는 “우호지분을 늘리기 위해 기관투자가들이 요청하기 전에 미리 찾아가 실적 변화 등을 브리핑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잠재주주인 기관투자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임원진이 직접 기관투자가를 관리하는 추세”라고 관계투자 강화 분위기를 전했다.전문가들은 미국의 사례를 들어 기관투자가들의 주주 역할이 더욱 강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식시장 내 기관비중이 높아지면서 장기투자가 확산되자 기관투자가들이 시장감시 기능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는 것이다.우리나라 역시 기업연금 도입이 논의되는 등 기관의 주식보유 비율이 높아질 요소가 많다는 분석이다.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 제시하는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나 좋은기업지배연구소 같은 단체들의 활동상이 두드러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원장을 맡고 있는 정광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싫으면 떠난다(팔고 나간다)’는 월스트리트룰 때문에 그동안 기관투자가들이 지배구조에 관심을 덜 가졌던 것”이라며 “앞으로 기관이 자금을 뮤추얼펀드 등에 장기 투자하는 식이 되면 기관들이 주주로서의 활동도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INTERVIEW / 김우찬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여전히 영업상 이해관계 따져”“기업지배구조 개선은 비정부기구(NGO)만 목소리를 높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기관투자가가 나서야 합니다.”최근 몇 년 사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기업가치와 실적을 높여 준다고 보고 이를 위한 방안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김우찬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이런 연구자 중 한 명이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운영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또 다른 직함을 갖고 있는 김교수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기관투자가의 역할을 강조했다.“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을 행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분위기가 조성돼 있지 못합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에서도 이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001년 11월에 문을 연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50개 대상기업을 선정, 매년 두 차례 컴퍼니 리포트를 발행한다. 또 이슈가 있을 때마다 자료를 만들어 회원사인 기관투자가들에게 제공한다.“지금까지 외국인 기관투자가와 국내 기관투자가의 회원사 비율이 9대1 정도입니다. 아직까지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가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김교수는 기본적으로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 행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직 주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최근 주주로서 기관투자가의 위상이 커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기관들이 의견을 표시하기에 앞서 여전히 영업상 이해상충관계를 따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