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소정의 절차 반드시 거쳐야…주먹구구 거리 멀어

‘당사는 스타 펀드매니저 몇 명에 의존하지 않고 프로세스에 의해서 운용됩니다.’ 국내 대표적 투자신탁회사인 KB자산운용의 홈페이지에 실린 문구다. 주먹구구식 운영이나 펀드매니저 개인의 판단에 따른 투자를 원칙적으로 금한다는 의미다.대신 체계적인 자산운용 프로세스와 공동의사결정방식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이와 관련, 삼성생명의 전영묵 포트폴리오운용팀장은 “과거에는 최고경영자의 결정에 따라 투자를 집행하는 일이 잦았다”면서 “이제는 최고경영자라도 소정의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기관투자가들이 변하고 있다. KB자산운용뿐만 아니라 운용하고 있다. 장기적 전략에 따른 투자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겠다는 의도다. 변동성이 심한 국내 증권시장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기관투자가는 종류에 따라 자금의 성격이 다른 만큼 투자전략과 프로세스도 차이가 난다. 대표적인 기관의 사례를 통해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자금운용 프로세스를 살펴본다.스타펀드매니저에 의존 안해기관투자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장기적 자금운용계획에 따라 투자를 집행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단기투자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실제 수익성 면에서 장기투자가 오히려 유리하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삼성생명의 전영묵 팀장은 “자금의 안정적 운용을 위해서 장기투자가 필수적”이라며 “아웃소싱업체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한다 해도 즉각적 대응은 자제하는 추세”라고 전했다.국내 최대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자금의 성격상 엄격한 법적 규제를 받는다. ‘기금관리기본법’은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금지하고 있지만 예외조항을 두어 국회의 승인을 얻으면 투자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단 자금운용의 기본적인 프로세스는 ‘국민연금법’에 근거해 제정된 ‘국민연금기금운용규정’과 ‘국민연금기금운용규정시행규칙’에 따른다. 이 규정들은 시장환경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한다는 취지하에 매년 개정된다.공단 자금운용의 뼈대는 연초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 확정되는 ‘기금운용계획’에 따른다. 기본적인 자산배분율이 여기서 정해진다. 연간 투자기준, 투자규모 등 보다 구체적인 투자계획은 ‘연간자금운용계획’을 통해 정해진다. 이 계획에 따라 어떤 금융상품에 얼마를 투자할 것인지가 가려진다.대표적인 생명보험사인 삼성생명 역시 매년 자산배분정책을 정한다. 자금의 성격이 크게 변하지 않아 배분율의 변동폭은 크지 않다. 자산배분은 연 단위의 전략적 자산배분(SAA)과 전술적 자산배분(TAA)으로 구분된다. SAA는 최고경영자, 최고재무관리자 등이 참석한 자산부채위원회(ALCO)에서 결정되고 TAA는 자산운용임원회의의 심의를 거쳐 결정된다.계량적 분석 통해 투자종목 결정장기적인 자산배분이 정해지면 투자업종, 종목, 규모 등이 가려진다. 기관투자가들의 타깃은 주로 대형우량주다. 장기적으로 안정적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상황, 산업성장성, 기술력, 기업의 규모 등 다각적인 가이드라인을 통해 투자대상을 선별한다.국민연금관리공단과 KB자산운용 등 직접투자를 하는 기관투자가들의 종목선택 프로세스는 거의 비슷하다. 대상선정의 과정은 두 단계로 볼 수 있다. 먼저 투자를 해도 좋은 종목을 정하고 이 가운데서 상황에 따라 실제로 투자할 종목을 선택한다.KB자산운용은 6개월에 한 번씩 ‘유니버스’라고 불리는 투자대상 종목을 가린다. 지난 3개월간 하루 평균 거래금액, 이자보상비율, ROE 등이 선정기준이다. 대개 거래소와 코스닥의 상위 200개 종목과 70여개의 업종대표주가 ‘유니버스’에 포함된다.실제로 투자를 집행할 종목은 ‘유니버스’에 선정된 종목을 5개의 섹터로 나눠 집중분석한 후 결정된다. 주가수익률과 3년간 이익성장성 등 계량분석과 지배구조, 재무건전성 등 정성적 분석이 동원된다. 여기에 시장과 주요 섹터에 대한 거시적 전망이 가미돼 3주에 한 번씩 모델 포트폴리오가 작성된다. 실제 포트폴리오는 주 단위로 열리는 주식운용팀 회의를 거쳐 선택된다.KB자산운용의 김경섭 주식운용팀장은 “통계적인 수치도 중요하지만 최고경영자의 자질 등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요소들도 고려해 기업을 분석한다”며 “지난 3년간 기업의 실적을 토대로 향후 3년간의 성장성을 추정,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아웃소싱을 통해 주식을 운용하는 삼성생명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종목선택은 전적으로 투신사의 몫이다. 삼성생명은 자산배분을 통해 투자규모를 정하고 적당한 투신사를 선택할 뿐이다. 다만 한 종목에 대해 가이드라인이 정한 규모 이상을 투자할 때는 투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위기관리위원회 상시 가동기관투자가라고 늘 성공투자를 할 수는 없는 일. 특히 변동성이 큰 국내 증권시장에서 위기는 상존한다. 기관투자가들은 예외 없이 위기관리조직을 상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장기적인 투자전략을 세울 때부터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의 리스크관리 팀장은 투자규모, 자산배분 등 핵심 투자전략을 수립하는 투자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리스크관리위원회도 운영하고 있다.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수익률이 기준수익률에 미달하면 즉시 위원회에 안건이 상정, 해결방안이 논의된다. 가이드라인이 정한 한도를 초과해 투자를 할 때도 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가이드라인의 폐쇄성에 숨통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직접투자를 하지 않는 삼성생명 역시 리스크관리 임원의 역할이 크다. 전술적 자산배분 정책을 결정하는 자산운용임원회의에 리스크관리 임원이 참석하며 리스크관리위원회를 둬 위기에 대처하고 있다.INTERVIEW 김경섭 KB자산운용 주식운용팀장“장기투자 환경조성되고 있어”기관투자가가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장기적인 투자전략으로 증권시장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KB자산운용의 김경섭 주식운용팀장에게서 국내 기관투자가의 과제와 전망에 대해 들었다.기관투자가가 단기투자에 몰두해 문제라는 지적이 많습니다.이론적으로 단기투자보다 장기투자가 수익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국내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지난 몇 년간 주가지수가 500~1000 사이에서 박스권을 형성, 시장이 정체돼 있었고 검증되지 않은 장기펀드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습니다. 장기투자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던 셈입니다. 하지만 최근 장기투자를 위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어 가시적인 변화가 기대됩니다.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우선 기업의 경쟁력이 많이 향상돼 안정적 수익을 올리고 있고 자사주 매각이라든가 배당을 높여 주주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장기투자를 선호하는 외국자본이 대거 들어오고 있는 점도 시장의 변화를 부추기고 있죠. 이에 따라 개인투자자들의 인식도 장기투자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주가의 단기적 하락에 대한 개인투자자의 항의전화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장기투자가 정착되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선진국들도 처음에는 단기투자 위주였습니다. 오랫동안 서서히 변화해 지금에 이르렀죠. 우리 경우도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연기금이 일관성을 갖고 장기투자를 한다면 변화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