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와인’ 칠레산 지난해 비해 수입액 200% 늘어

요즘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칠레산 와인이 화두다. 프랑스산 와인 못지않은 품질에 저렴한 가격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4월 칠레 와인 수입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0% 이상 늘었다. 국내 수입와인 순위에서도 지난해 5위였던 칠레 와인은 현재 프랑스에 이어 미국과 2위를 다투고 있다. 와인전문가들은 “한ㆍ칠레간 자유무역협정(FAT) 체결로 관세가 철폐되면 칠레 와인의 인기는 더욱 올라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칠레산 와인인 칼리나(Calina)를 수입하고 있는 아영주산측은 “지난 한해 동안 400박스(1박스당 12병)를 팔았는데, 올해는 한달에 1,500박스를 팔고 있다”며 “칠레 본사에서도 깜짝 놀랄 정도”라고 밝혔다.이렇게 국내에서 상한가를 치고 있는 칠레 와인은 이른바 신대륙 와인이다. 와인은 생산지에 따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에 기반을 둔 구대륙 와인과 미국, 칠레, 호주 등 신대륙 와인으로 구분된다.구대륙의 와인은 생산, 제조(블렌딩), 저장에 있어 수백년간 이어져 온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한다. 자연 고유의 맛을 내기 위해 포도에 물도 주지 않고 소량생산을 원칙으로 삼는다. 이들에게 와인은 문화이자 예술이다. 이에 반해 신대륙 와인은 과학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비싼 오크통 대신 값싼 스테인리스통에 오크조각을 띄워 두는 ‘합리적인’ 편법도 주저하지 않는다. 와인유통업체 와인나라의 김영심 마케팅실장은 구대륙 와인과 신대륙 와인을 비교하며 “예술과 기술의 차이”라고 꼬집었다.하지만 최근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칠레산 와인을 살펴보면 신대륙 와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머쓱한 와인도 많다. 국내 중저가 와인시장에서 상한가를 치고 있는 칼리나는 미국 와인회사인 켄달잭슨이 칠레에서 생산하는 와인이다. 또 칠레 와인 중 세계 정상급 와인으로 인정받는 알마비바(Almaviva)는 프랑스의 와인 명문가 샤토 무통 로쉴드(Chateau Mouton-Rothschild)와 칠레의 와인업체 콘차이 토로(Conchay Toro)가 합작해 만든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이다. 특급 레드와인 세냐(Sena) 역시 칠레 회사인 비냐 에라수리스가 미국의 로버트 몬다비와 합작생산하고 있다.비단 칠레뿐만이 아니다. 세계적 와인업체들은 이미 칠레,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국경을 넘나들며 현지 와인업체들과 손잡고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와인의 국적보다는 생산자의 브랜드 파워가 더욱 커지고 있는 셈. 우종익 대유와인 사장은 “소비자들이 와인을 고를 때 과거에는 지역을 따졌지만 최근에는 브랜드를 눈여겨본다”고 설명했다.구대륙의 전통적인 제조방식이 신대륙에 스며들면서 신대륙에서도 프리미엄급 와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의 로버트 몬다비와 프랑스의 바롱 필립 로쉴드가 합작해 만든 ‘오퍼스 원’(Opus 1)이 대표적인 예다. ‘작품 1’(Op 1)을 의미하는 이 와인은 구대륙과 신대륙의 조화를 상징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프랑스의 전통과 미국의 기술이 잘 어우러진 와인으로 칭송받으며 로버트 몬다비는 일약 프랑스 보르드의 유서 깊은 와인업체들과 어깨를 견주게 됐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는 “미국 최대의 업적은 할리우드 영화나 재즈, 팝이 아니라 바로 오퍼스 원”이라고 평가했다.따라서 현재 와인시장은 저급 와인뿐만 아니라 고급 와인에서도 신대륙의 공세가 거세졌다. 지난해 프랑스 농림부는 자체 발표한 보고서에서 “신대륙의 야만인들이 프랑스 문턱까지 몰려왔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정도다. 실제 최근 5년간 프랑스의 와인 수출은 매년 최고 5% 감소하거나 제자리걸음이었다. 반면 신대륙의 와인 수출은 매년 10% 이상의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국내 역시 마찬가지다. 올 1/4분기 국내로 수입된 외국와인 중 미국, 칠레, 호주 등지에서 생산된 신대륙 와인 수입량은 지난해 동기 대비 무려 118%나 증가했다. 반면 프랑스 등 구대륙 와인의 수입량은 23% 감소했다. 신대륙 와인의 인기는 국내 고급 와인시장에서도 거세게 불고 있다. 와인나라가 국내 유명호텔 레스토랑 10곳의 하우스와인(레스토랑 대표 와인)을 조사한 결과 전체 25종 가운데 신대륙 와인이 17종(미국 7종, 호주와 칠레 각 5종)으로 68%였고, 프랑스 5종을 포함해 구대륙 와인이 10종류로 신대륙 와인이 강세를 보였다.하지만 최고급 와인시장에서는 프랑스 와인이 여전히 독보적이다. 우종익 사장은 “아무리 신대륙이 좋은 와인을 만든다 하더라도 최종 모방 대상은 보르도와 부르고뉴 지방의 특등급 와인”이라며 “국내에서도 없어서 못 파는 와인”이라고 설명했다.INTERVIEW 신대륙 vs 구대륙미국 실용주의, 프랑스 전통고수 ‘팽팽’얼마 전 프랑스와 미국의 와인전문가가 나란히 한국을 찾았다. 한쪽은 전세계에서 신대륙 와인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와인회사 켄달잭슨의 아시아 총괄이사. 다른 한쪽은 프랑스 론 지방의 명망 높은 샤토(포도원)의 4대손. 이 두 사람에게 신대륙과 구대륙, 그 차이점을 물었다.◇언제나 변함없는 편안한 와인“와인은 편하게 마시는 술입니다. 일단 먹어보면 계속 우리 제품을 사게 될 겁니다.”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업체 켄달잭슨의 스티브 매싱어 아시아 총괄이사는 “캘리포니아 고유 품종인 진판델로 만든 담백한 와인이 한국음식, 특히 불고기에 잘 어울린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 그만큼 한국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는 게 이유다.현재 국내 와인시장에서 미국은 프랑스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켄달잭슨이 생산하는 칠레산 칼리나는 국내 중저가 시장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켄달잭슨의 캘리포니아산 와인인 그랑리저브의 경우 국내 항공사 퍼스트클라스에 납품되고 있다. 매싱어 이사는 와인연구로 유명한 UC데이비스에서 양조학을 전공했고 94년부터 켄달잭슨에 근무했다.그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장점에 대해 “블렌딩보다 포도품종을, 그리고 세계 각지에 뻗어 있는 자사의 네트워크”를 들었다. 현재 켄달잭슨은 칠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 호주에도 와이너리를 보유하고 있다.짧은 캘리포니아 와인의 역사도 장점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최근 끊임없는 연구와 전통적인 방식을 도입하려는 합리성으로 캘리포니아 와인의 품질을 빠른 속도로 높여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어 “캘리포니아 와인은 빈티지와 무관하게 매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며 “사람들이 언제나 편하고 변함없는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강조했다.◇‘블렌딩’과 ‘테루아’의 힘“그해 생산된 포도가 우리가 정해놓은 기준에 못미치면 아예 와인을 내놓지 않습니다. 샤토 보카스텔의 경우도 2002년 빈티지(수확연도)가 없습니다.”도멩 페랑의 피에르 페랑 아시아담당 이사는 프랑스 론 지방의 유서 깊은 와이너리인 샤토 네프 뒤 파페의 4대손이다. 와인 MBA라 불리는 프랑스 디종대학의 와인 양조학 학위를 받았고, 최근 이 회사의 대표상품 샤토 보카스텔을 제조하고 있다.과거 캘리포니아 와인업체에서도 일했다는 그는 프랑스 와인의 강점으로 “수세기에 걸쳐온 블렌딩 기술과 프랑스만의 테루아”를 들었다. 테루아는 토양, 기후, 일조량, 지형 등 포도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요소를 뜻한다. 즉 캘리포니아에서 론 지방의 포도품종과 똑같은 것을 가져와 재배한다 해도 그 테루아까지 가져갈 수 없다는 의미다. 페랑 이사는 테루아를 그대로 표현해내기 위해 재배시 농약은 물론 전부 수작업으로 재배한다고 강조했다. 인공적 요소는 철저히 배제한다는 것. 이 때문에 빈티지에 따라 품질이 들쭉날쭉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빈티지는 과감히 포기한다. 그는 “수백만 달러어치 손해를 볼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수백년간 쌓아온 명성을 잃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