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권은 상승장 발목잡는 '물귀신' 비난도

은행, 증권, 보험, 투신, 연기금 등을 아우르는 기관투자가 중 현재 증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곳을 꼽으라면 투신사들이다. 일반 개인은 물론 연기금, 보험 등 여타 기관투자가들까지 돈을 맡기는 곳이 바로 투신사다.국내 투신사들의 주식운용 방식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최근 몇 년 동안 꽤 선진화돼 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 시발점은 지난 99년의 ‘바이 코리아’ 열풍이었다. 투신권의 주식형펀드 수탁고(펀드판매액)를 급증시켰던 이 캠페인 기간에 각 투신사들은 고객유치 전략으로 스타 매니저를 전면에 내세우며 주식형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시스템’이 아닌 매니저 개인 능력에 펀드운용을 맡기는 것으로 이후 큰 후유증을 남긴다.2000년 증시가 하락세로 돌아서기 시작하면서 개인 능력에만 의존하는 주식 매매는 리스크 관리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종종 매니저가 회사를 떠나 버리면 펀드운용 자체가 한동안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있었다.이렇게 해서 2000년부터 대다수 투신사들은 ‘팀제’를 강조하는 매매시스템을 마련하게 된다. ‘개인플레이’를 차단하고 전체 펀드매니저의 리서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템플턴 등 세계적 자산운용사들의 시스템과 유사한 방식이다. 우선 각 투신사들은 수익성 부채비율 배당성향 등 각종 지표를 통해 200~300개의 투자풀을 만든다. 이들 기업 중 기업방문 등을 거쳐 투자시점에 가장 유망하다고 분석된 30여개 종목을 최종 선정, 모델 포트폴리오를 짠다. 여기에는 종목별로 투자비중도 정해져 있다. 펀드매니저들은 이 모델 포트폴리오 구성종목 안에서 투자비중에 맞춰 매매를 해야 한다. 이 같은 운용방식의 도입은 몇가지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줬다. 펀드매니저의 개인 판단에 따라 운용할 때 잦았던 매매가 줄어든 점이 대표적이다. 99년까지 개인의 2~3배에 달했던 투신권 매매회전율이 현재는 개인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투신사는 지난해 3월 이후 증시 상승장에서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는 상승장의 발목을 잡는 ‘물귀신’ 역할을 해왔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주식을 사기는커녕 주가가 오를 때마다 투신사들은 주식을 파는 데만 열중해 왔다. 그 결과 투신권의 주식형펀드(순수주식형+혼합주식형) 수탁고는 지난해 3월 말 28조3,000억원에서 현재 18조9,000억원으로 9조4,000억원 급감한 상태다.하지만 이 같은 현상을 두고 투신권만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투신사들이 이처럼 주식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거 종합주가지수 800~1000시대에 가입됐던 주식형펀드가 주가상승으로 속속 원금 회복이 되자 고객들이 펀드를 환매했기 때문이다. 펀드평가회사인 제로인의 이재순 팀장은 “투신사는 어디까지나 고객의 돈을 맡아 운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고객 성향이 이들의 매매패턴에 그대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며 “주식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고 장기투자보다는 단기적 투기매매에 치중하는 우리나라 일반투자자들의 모습을 투신사들이 그대로 닮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계 투신사마저 지난해 3월 이후 주가상승 과정에서 수탁고는 계속 줄고 있는 게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하지만 한 투신업계 관계자는 “국내 투신사들은 은행, 증권사 등 다른 금융회사의 자회사나 재벌 계열사가 많기 때문에 모회사 정책에 따라 운용정책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며 “투신사들은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운용을 하기보다 단기성과에 연연하는 측면이 많다. 이로 인해 고객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투신권은 단기적으로 증시의 급변동을 유발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선물과 현물간의 가격차이를 이용해 무위험 수익을 추구하는 프로그램 매매를 통해서다. 물론 이 같은 프로그램 매매는 투신권 외에도 국내 및 외국계 증권사 자금도 상당부분을 차지하고는 있다. 투신권은 차익거래펀드나 고유자금(회사 자체 자금) 등을 통해 프로그램 매매에 참여한다. 차익거래자들은 선물가격이 현물가격에 비해 일시적으로 고평가 현상(베이시스 확대)이 일어나게 되면 고평가된 선물을 파는 동시에 저평가된 현물을 산다. 프로그램 매수가 유입되는 것이다.하지만 이는 선물과 현물간 가격차이가 정상수준으로 좁혀질 때 곧바로 매물화(선물매수+현물매도)되면서 증시에 수급부담을 주는 요인이 된다. 특히 이 같은 프로그램 매매는 외국인 선물투자자의 매매에 강한 영향을 받는 경향이 높다.190조원 가량 되는 국내 57개 연기금은 주로 채권 등 안전자산을 통해 자금을 굴리고 있다. 기획예산처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연기금의 주식투자금액은 4%에 불과한 실정이다. 우선 지금까지 주식투자를 원천적으로 금지해 놓은 ‘기금관리기본법’이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가로막은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최근 이 법의 개정을 놓고 사회적 논란이 제기되고 있지만 설령 개정된다 해도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중이 단기간에 급증할지는 의문이다.우재룡 한국펀드평가 사장은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등을 제외하고 국내 연기금의 대다수는 매년 써야 할 돈이 정해져 있는, 소위 ‘사업성기금’들로 원금보장을 전제로 자산을 운용해야 한다”며 “이 때문에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율은 최대 10%를 넘을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도 상대적으로 주식투자 여력이 있는 편이지만 아직 연기금의 주식투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주식투자를 단기간에 늘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연기금의 경우 수익률이 낮은 채권투자는 수수료 절감 등의 목적으로 자체 운용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주식투자는 투신권 등에 아웃소싱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국민연금 정도만이 주식투자 자금의 절반 가량을 자체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지난 3월 말 현재 금융자산은 103조4,0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이중 주식투자 자금은 7.7%인 8조원 수준이다. 4조원은 투신권에 아웃소싱을 줬고 나머지 4조원을 자체로 운영하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단기적인 증시변동에 따른 발빠른 주식매매를 위해서는 아웃소싱 방식을 활용하고 있고 자체 운용자금은 장기투자 성향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투신권과 국민연금을 포함한 연기금은 손절매(로스컷) 규정이 있어 하락장에서 주가 하락폭을 더 확대시킨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손절매란 보유종목 주가가 매입단가보다 20~30% 가량 하락하거나 펀드수익률이 마이너스 5~10% 넘게 떨어질 경우 추가 손실을 방어하기 위해 보유주식을 처분하는 리스크 관리 규정을 말한다. 지난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까지 종합주가지수가 단기급락하는 과정에서 일부 기관의 손절매 물량이 출회돼 주가 낙폭이 더 커졌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은행과 보험 등 나머지 기관은 외환위기 이후 증시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은행권은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라는 족쇄에 걸려 주식 같은 위험자산 투자를 기피하고 있다. 지난해 종합주가지수가 500선 초반까지 떨어질 때 국민은행은 1조원을 증시에 투입해 2,000억원 가량 수익을 낸 경우도 있다. 하지만 국민은행도 지난해 말 결산을 앞두고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BIS 비율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회사측은 설명했다.<한국경제신문>이 올해 초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 삼성화재, 동부화재 등 국내 대형보험사 5개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올해 주식투자를 늘릴 계획을 갖고 있는 회사는 한 곳도 없었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만기가 긴 보험상품의 특성상 단기변동이 심한 주식은 자산운용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주식보다는 채권투자를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