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계열 S사의 수원공장에서 92년부터 지난해까지 12년간 근무했던 윤경중씨(42). 지금은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이지만 직장인이던 지난해 7월을 잊지 못하다. 아침 출근길에 눈에 들어온 ‘공장폐쇄’라는 단어가 요즘도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 그후 적잖은 세월이 흘렀건만 신문이나 방송에 퇴직과 관련된 ‘삼팔선’이나 ‘사오정’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자신의 일인 양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다.윤씨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이처럼 무척이나 덥던 지난해 7월 갑자기 찾아들었다. 가족들과 휴가를 떠날 생각에 들떠 있다가 회사로부터 공장문을 닫는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회사를 상대로 투쟁도 해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한마디로 눈앞이 캄캄했어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나 할까요. 더욱이 사전에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던 터라 절망감은 더욱 컸지요. 회사측의 일방적인 선언 이후 버스를 대절해 두 달간 서울 본사를 오르내리며 전 직원이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회사측은 ‘채산성이 맞지 않아 더 이상 공장을 운영할 수 없으니 방법이 없다’며 매정하게 거절했습니다.”결국 두달 만인 지난해 9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퇴직금과 23개월치의 위로금을 들고 정들었던 회사를 나섰다. 홀로된 시골(충남 천안) 아버지와 1남1녀의 자녀가 흑백필름이 돌아가듯 눈에 아른거리고 서러운 눈물이 북받쳐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자식만 바라보고 계신 아버지에게는 뭐라 핑계를 대고, 또 애들은 무슨 면목으로 볼 것인가….’무거운 발길을 옮겨 겨우 집으로 돌아온 윤씨는 일단 정신부터 수습해야 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쳐다보는 부인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오히려 서럽게 다가왔다.“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저부터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욱이 그동안 변변히 모아 놓은 돈도 없어 여기서 흔들리면 우리 가족 전체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윤씨는 다음날부터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자녀들이 눈치챌까 봐 공휴일을 제외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시간에 맞춰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주변의 산을 올랐다. 뭔가 계획을 세우고 싶었지만 당장은 머리가 뻥 뚫린 기분이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다행히 퇴직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회사에서 재취업 및 창업컨설팅 강좌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자칫 더 방황할 수도 있었는데 그나마 위안이 됐다. 일단 뭔가 할 일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특히 전문가들과의 상담을 통해 미래에 대한 준비를 시작할 수 있어 장래계획을 설계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두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하지만 현실의 벽은 아주 높기만 했다. 재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녀 봤지만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수원과 안산 등지의 공단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사원을 모집하는 곳에 문의를 했지만 나이가 많다며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 이력서만 무려 50장 가까이 냈지만 소득은 없었다. 간혹 같이 일해 보자며 연락이 왔지만 급여가 100만원 정도로 매우 열악했다. 가장의 일자리치고는 급여가 너무 적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재취업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윤씨는 창업에 눈을 돌렸다. 퇴직금과 위로금을 합치면 뭔가 하나쯤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컨설팅을 받는 한편으로 부지런히 자료를 수집했다. 주변 사람들 중에 창업을 한 사람들을 찾아가 분위기를 살폈다.그러나 이 쪽도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경기가 워낙 나빠서인지 장사가 잘되지 않는데다 창업비용 또한 만만치 않게 든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1억원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사정은 크게 달랐다. 적어도 1억5,000만원은 있어야 그나마 안정적으로 생계를 꾸릴 만한 점포를 차릴 수 있었다.밤잠을 설칠 정도로 고민이 밀려들었다. 경제적인 부담이 너무 커 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가진 돈을 다 모아도 웬만한 점포를 하나 내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창업비가 적게 드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영업을 잘해야 버틸 수 있는 업종이 대부분이었다.일각에서는 작지만 호프집이라도 하나 차리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안정적인 수입이 나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실제로 시장조사를 해보니 신통치 않았다. 특히 장사 경험이 전혀 없는 자신에게는 ‘물장사’가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많은 업종을 저울질하다 건강원을 찾아냈다.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눈에 들었고, 무작정 본사를 찾아갔다. 건강 관련 업종이라 최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창업비도 다른 업종보다 적게 든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재취업 원서만 50여번 써고민 끝에 업종을 정한 윤씨는 입지를 물색했다. 일단 집에서 가까운 곳을 생각했고, 본사의 도움을 받아 한창 개발 중인 수원 정자지구가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상가건물의 1층을 빌려 지난해 12월 말 부인 명의로 점포를 냈다. 돈이 좀 모자라 은행에서 대출도 받았다.건강원을 굳이 부인에게 맡긴 것은 자신은 기회가 닿으면 다시 취업하기 위해서다. 아직 재취업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도 틈틈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인다.“일단 가게를 하나 차렸으니 한시름 덜었죠. 아직 흑자는 나지 않지만 마음은 편안합니다. 불면증도 사라졌어요. 아버지와 아이들한테도 가게를 차린 다음에야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했어요. 그나마 말할 구실이 좀 생기더군요. 하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닙니다. 가게를 흑자로 만들어야 하고, 은행에서 빌린 돈도 갚아야 하니까요.”윤씨는 요즘 아파트 단지를 누비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지도가 낮은데다 건강원의 특성상 고객들과 친밀도를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처음이라 그런지 주변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용기를 얻고 있다.“회사에 다닐 때는 몰랐는데 홀딱 벗고 허허벌판에 서보니 그동안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 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창업을 하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무지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많은 도움을 줘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잘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윤씨는 아직 회사에 다니는 작장인들에게 퇴직 선배로서 “회사를 떠난 다음 할 일을 직장에 다니면서 틈틈이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춰볼 때 별다른 계획 없이 회사를 떠나면 십중팔구 소자본 창업을 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는 얘기다. 윤씨는 “회사에 다닐 때는 적어도 정년은 채울 줄 알았는데 완전히 빗나갔다”며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를 나오게 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미래를 차분하면서도 치밀하게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