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한 백화점의 문화센터. 이른 오후부터 주부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아직은 한산해 보이는 아래층 매장 풍경과 대조적이다. 200여평 규모의 강당식 이벤트홀에 모인 주부는 300여명. 오늘 준비된 프로그램은 ‘재미있는 발레 이야기’이다. 국내 유명 발레단의 단장이 나와 발레에 대해 직접 설명을 하고 시범공연을 보여준다. 공연 내내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무대에 집중하다 해설자가 나와 설명을 해주면 그제야 ‘아, 그런 거구나’ 하며 무릎을 친다.이날 공연을 관람한 김수진씨(39ㆍ부천시 상동)는 “다양한 문화 장르를 손쉽게 접할 수 있어 문화센터를 자주 이용한다”며 “급하게 조성된 신도시라 문화시설이 부족한 편인데 문화센터가 부족분을 메워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공연을 기획한 현대백화점 안지현 주임은 “대중문화는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고급문화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문화센터 공연에는 되도록 오페라, 연주회, 발레 등 클래식 위주로 프로그램을 구성한다”고 설명했다.공연을 준비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출연료와 무대장치 등 공연 때마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에다 문화센터를 운영하는 고정비 등을 감안하면 최소한 수백만원은 소요된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그러면 전문예술단체도 아닌 백화점이 왜 이처럼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문화에 공을 들이는 것일까. 현대백화점 박광혁 이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한정된 시장을 놓고 백화점 간의 경쟁은 물론 할인점 등 다른 유통채널과도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상품구성, 가격과 같은 기존 경쟁 수단으로는 할인점과 경쟁이 안된다”며 “그들과 차별화된 고급 쇼핑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문화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태평양, 설치미술작가 지원화장품 생산업체인 태평양의 본사를 방문하면 백남준, 노상균, 로버트 인디애나 등 잘 알려진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로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각 층별 조그마한 휴게실에도 미술품이 걸려 있는 등 임직원에게 문화적 감성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태평양 문득일 실장은 “좋은 예술작품을 보면서 구성원이 좋은 경험을 공유, 그 느낌을 제품개발에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미와 건강을 다루는 업종의 특성상 문화적인 감성은 고객과의 좋은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이다”고 말했다.태평양은 지난해부터 설치미술 작가를 지원, ‘헤라뜰리에 아트’라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노상균, 유현미, 오인환, 김희경 등 서로 다른 성향의 한국 작가 4명과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안젤라 블로흐(Angela Bulloch)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해외작가와 금속공예가 왕기원, 사진가 강영호, 디자이너 김두섭 등이 참가해 작품세계를 구성했다. 이 행사에 후원된 금액은 2억원이다.전시회를 기획한 문실장은 “전시회 이름에 회사 제품의 이미지가 들어가 있지만, 작가들에게 상업적인 작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단지 여성이나 미를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선정, 그들에게 자신의 작품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하도록 해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말했다. 전시회의 효과에 대해 그는 “이 행사는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순수한 문화예술 지원이었지만 전시회 개최 후 각종 언론매체는 물론 순수예술 전문지에도 많이 소개돼 회사와 제품의 이미지에 예술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덧붙였다.하나은행, 미술품에 주력하나은행은 전신인 한국투자금융(1971년 설립) 시절부터 미술품 구입을 꾸준히 해 왔다. 2003년 말 현재 2,700여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구입 후 가격이 크게 올라 투자로서도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 하나은행이 80년대 중반 구입한 이응로 화백의 그림은 이화백의 사후에 2배 이상 올랐고, 본사 영업장 전시를 위해 구입한 백남준 작품은 무려 5배 이상 폭등했다. 이 때문에 구입 당시 일부 직원들로부터 “은행이 고가의 미술품을 왜 구입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 높은 투자 가치가 입증되면서 직원들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한다.하나은행은 이밖에 전시공간 확보가 어려운 예술인들에게 전시공간을 무료로 대여해 주는 한편 서울시립미술관과 후원협약을 체결하고, 미술품을 구입해 무상으로 임대하는 등 미술계에 대한 후원과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하나은행은 매년 20여억원을 문화활동에 지출하고 있으며, 서화 구입비는 별도의 예산으로 책정돼 있다.하나은행 강용관 홍보팀장은 “미술계를 후원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고급은행’이라는 이미지를 고객들에게 심어준 것”이라며 “요즘처럼 은행들마다 금리나 상품구성 등에서 큰 차이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긍정적인 이미지는 고객들의 선택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경쟁 요소라고 생각한다. 특히 각 은행들이 유치에 주력하고 있는 VIP 고객들에게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포스코, 순수예술 공연전라남도 광양에는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공연시설이 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백운아트홀’이 그것이다. 전형적인 어촌마을이었던 광양만에 제철소가 들어서고, 문화시설인 백운아트홀이 92년 뒤따라 건립됐다. 객석 1,088석 규모의 백운아트홀은 14만여명 광양시민뿐만 아니라 인근 순천, 여수, 여천, 남해 지역민들의 문화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백운아트홀은 입장권의 50% 이상을 인터넷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최근에는 <호두까기 인형>이 백운아트홀에 올려졌다. 105명의 국립발레단 출연진과 스태프가 총출동한 대형공연이다. 공연을 기획한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김종화 과장은 “문화 혜택이 적은 지방도시에서 이 같은 수준의 공연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며 “지역주민들을 위한 사회공헌 차원에서 순수예술 공연을 중심으로 매월 4건 이상의 공연을 기획한다”고 말했다.지난 92년 개장한 이래 포스코가 백운아트홀에 후원한 금액은 모두 255억원. 이 돈으로 연인원 356만명의 지역주민들이 문화 혜택을 누렸다.특히 문화시설 이용률이 전국적으로 연평균 0.36회(2002년ㆍ문화관광부)인 것에 비해 광양시민의 백운아트홀 이용률은 연 2.2회인 것으로 나타나 다른 시ㆍ군민보다 6배 이상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객의 소비패턴 ‘품질’에서 ‘품격’으로삼성경제연구원 민동원 연구원은 “고객의 소비패턴이 ‘품질’ 중심에서 ‘품격’ 중심으로 옮아가면서 기업들이 소비자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문화를 매개로 하는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차별화, 고급화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다”고 현재의 추세를 설명했다.기업이 문화예술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에는 기업마다 차이가 있다. 문화관광부 용호성 문화예술교육팀장은 “재단을 만들어 모든 지원사업을 총괄토록 하는 경우가 있고, 기업 내에 지원 전담부서를 두는 경우도 있다. 또 기업 홍보 혹은 마케팅 부서를 통한 방식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반적인 지원 형태이다. 이런 경우 순수한 후원보다는 일정한 홍보활동의 대가 형식의 지원인 협찬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지원금이나 기부금 예산이 아니라 광고선전비 등 마케팅 관련 예산에서 지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그러나 어떠한 지원방식을 택하든 기업이 기대하는 가장 큰 효과는 기업이미지 제고 측면이다. 물론 어떠한 조건도 부여하지 않고 순수하게 후원하는 식의 기업 지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상호간에 혜택을 주고받는 거래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한국문화정책연구원 김소영 박사는 “기업에 대한 평판 증대, 미디어 노출 빈도 증가, 상표 자산의 증가, 경쟁사와 다른 이미지 창출 등의 요인으로 인해 기업이미지가 제고된다”고 기업의 문화지원 효과에 대해 설명했다. “부수적으로는 주주, 정부, 협력업체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 기업활동이 한층 용이해진다”고 덧붙였다.반대로 기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도 문화예술 지원 프로그램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대표적인 다국적 회사 필립모리스는 담배회사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완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예술활동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 특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진보적인 실험예술의 경우 필립모리스의 지원이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더구나 미국의 경우 담배광고는 상당한 제한을 받기 때문에 문화예술단체의 지원을 통해 홍보에도 도움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체계화된 프로그램 만들어야 문화지원 활발태평양에서 문화후원 업무를 담당하는 문득일 실장은 하루에도 수차례 문화예술단체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대부분 후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 오는 경우도 있고, 무작정 담당자를 바꿔 달라며 통화를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마다 문실장은 난감하다. “예산은 한정돼 있는데 지원요청은 계속 몰린다. 그리고 지원을 요청하는 문화예술단체들을 살펴보면 기본적인 틀조차 갖추지 못한 곳이 허다하다. 이사회와 전문직원 조직을 갖추지 않은 것은 물론 설립취지나 활동목표조차 명확하지 않은 단체가 대부분”이라며 지원 업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지원절차의 불확실성과 비공식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문화관광부 용팀장은 “기업 자체의 정기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통한 지원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기업 내부의 주요 경영진이나 의사결정자와 개인적인 친분관계 없이는 정보조차 얻기 힘든 실정”이라며 “지원을 요청하는 문화예술단체는 사적인 경로에 지속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원받기에 가장 적합한 단체보다는 이러한 친분관계를 갖고 있는 단체만이 기회를 갖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말했다.따라서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 지원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업별로 정기적이고 공식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전에 지원 예정 총액과 함께 명확한 지원취지, 지원분야 및 심사기준을 밝힘으로써 문화예술단체들이 이에 적합한 사업을 기획하여 지원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다.용팀장은 “이러한 체계화는 비단 지원을 요청하는 문화예술단체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한정된 재원으로 가장 우수한 문화예술단체를 선택, 효과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기업이미지 제고나 시장확대에도 당연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메세나 회원사, 170여개사로 다시 늘어지난 1994년 기업과 문화예술계를 연결해 주는 통로로 발족한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당시 문화부와 문화예술진흥원은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가입을 권유해 167개 기업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던 것이 IMF 때 회원사가 120개사까지 줄었다가 최근 170여개로 다시 늘었다.현재는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활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는 ‘메세나’(Mecenat)라는 명칭은 로마시대 문화예술계 문호들의 후원에 헌신했던 가이우스 마에케나스(Gaius Maecenas)라는 실존인물의 이름에서 유래했다.‘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는 회원사를 중심으로 기업들이 문화예술과의 연대를 확대해 나갈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문화예술계와 기업을 연결해주는 사업을 펴고 있다. 최근에는 CEO들이 기증한 물품을 경매해 문화지원활동을 벌이는 ‘CEO 도네이션’과 어린이병동, 소년원 등 소외된 곳을 방문해 연주활동을 벌이는 ‘찾아가는 메세나’ 등의 대외행사를 활발히 벌이며 메세나 홍보에 여념이 없다.그러나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문화계와 기업을 잇는 복덕방 역할이 지적되고 있다. 한국문화정책연구원 김박사는 “문화계와 기업이 모두 서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협의회는 둘 사이를 이어주는 복덕방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즉 협의회는 회원사들의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을 위탁받아 문화예술단체로부터 지원신청을 받고 이를 평가, 그 단체와 가장 적합한 기업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이 그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경우 기업의 입장에서는 한정된 지원예산을 가지고도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지원실적을 거둘 수 있고, 불필요하게 문화예술단체와 접촉함으로써 낭비되는 기업의 인력자원과 시간도 아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메세나협의회가 자체 기금을 갖춘 재단으로 변신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협의회는 회원사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사답법인 형태이다. 즉 일부 문화예술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직접적인 지원기관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협의회가 기업과 문화계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기업들의 대규모 출연을 통해 자체 기금을 조성, 직접적인 지원 기구로 나서는 방안도 현실성 있게 검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