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체 현상 ‘뚜렷’, 지방대 약진도 ‘눈길’

‘성과가 있는 곳에 승진이 있다.’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엄밀히 말해 이 같은 논리가 통하지 않는 게 그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이 유지해 온 인사관리 방식이었다.트렌디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요즘과 달리 지난 80~90년대에는 샐러리맨의 애환을 그린 TV드라마가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이들 드라마에서 공통적으로 비중 있게 다룬 내용 중 하나는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직장인들의 모습이었다. 실적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인맥을 다지는 것이 승진과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간 우리나라 기업들의 인사관리가 어떤 식으로 이뤄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다.이처럼 연공서열과 인맥 등이 중시돼 왔던 기업의 임원 인사는 최근 2~3년 사이에 성과주의로 선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인사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기업의 임원인사가 IMF 외환위기를 겪은 뒤 성과주의적 성격이 강해졌다고 평가한다. 최근의 임원 인사 역시 이 같은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다.지난 1월 중순 임원 인사를 단행한 삼성전자의 경우 역대 최대 규모의 승진 인사를 실시했다. “어려운 경영환경에서도 지난해 그룹이 115조원의 매출 실적을 달성한 것을 반영했다”는 게 회사측이 밝힌 대규모 인사의 이유다. ‘실적이 있는 곳에 승진이 있다’는 원칙이 투영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전년(363명)보다 80여명이나 많은 448명이 승진했다.지난해 삼성전자는 매출액 43조6,000억원으로 2000년대 들어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처럼 경영실적이 좋았던 회사들에 대해 승진 규모를 대폭 늘린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총 106명의 임원 인사를 실시한 현대차그룹 역시 사상 최대 수출 실적을 올린 해외영업 부문과 연구ㆍ개발(R&D) 부문의 승진 폭이 컸다. 현대자동차 68명, 기아자동차 38명에 적용된 이번 인사에서 승진 인사 중 60%가 해외영업(20%)과 R&D(40%) 분야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세대교체가 본격화된 것도 올해 국내 기업들의 인사 특징이다. 삼성의 경우 부사장, 전무 승진자가 역대 최대인 80명에 달했다. “삼성의 경영을 이끌어갈 CEO후보군을 두텁게 하겠다는 포석의 일환”이라는 게 회사측의 말이다. 또 이번 인사로 삼성은 전체 임원 중 67%를 40대가 차지하게 됐다. 인사 전 58%였던 40대 임원이 10% 가까이 늘어나면서 임원의 평균연령도 48.3세에서 47.4세로 젊어졌다.LG는 전체 임원 승진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신규 임원의 평균연령이 43.6세로 지난해(44세)보다 젊어졌다. 또 LG전자의 경우 신규 임원 25명 중 20명이 45세 이하다.올해 임원 인사에서는 최근 사회 전반에 불고 있는 이공계 바람을 반영한 때문인지 기술직 출신 승진자들의 면면도 돋보인다. 삼성은 올해 임원 인사에서 기술직에 대해 최대 규모의 승진 인사를 실시했다. 연구개발을 포함한 기술직 승진자는 총승진자의 34.3%에 달했다. 총 154명으로 2002년 106명, 2003년 122명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빠른 속도로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지난 2월 초 있었던 효성그룹의 정기인사의 경우에도 기술담당임원(CTO) 직제가 신설되고, 승진 임원 중 이공계 출신이 70%에 달하는 등 기술인력 중용이 두드러졌다.또 최근에 각 기업이 발표하는 임원 인사에서는 학벌주의가 다소 수그러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공서열 대신 실적에 대한 보상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우리나라 특유의 학벌주의도 실적주의 앞에서 점차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서울의 몇몇 명문대학 출신에게 한정돼 있는 듯 보였던 기업 임원의 문호가 지방대 출신들에게도 열리고 있다는 이야기다.LG전자는 올해 처음으로 별을 단 임원 중 40%가 지방대학교 출신이다. 현대자동차 역시 신규 임원인 이사대우 26명 중 8명이 지방대 출신이다. 현대자동차는 우리나라에서 소위 명문대로 군림해 온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 6명으로, 오히려 지방대 출신보다 더 적었다.이밖에도 글로벌마켓을 겨냥해 해외인재를 대폭 중용한 점도 올해 임원 인사에서 눈에 띄는 점이다. 지난해 말 정기인사를 마친 LG전자는 글로벌사업 확대를 위해 북미, 유럽지역에 총괄조직을 신설했다. 또 모스크바 지사장으로서 러시아 지역에서 휴대전화를 비롯한 여러 제품의 시장 확대에 기여한 변경훈 상무는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매년 40% 이상 성장을 주도하며 중국 톈진법인을 중국 북부 최대 가전 생산법인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던 손진방 LG전자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 중국지주회사 대표이사가 됐다.중국시장에 대한 관심은 삼성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번 인사를 통해 16명이 중국 지역에 승진 발령이 났다. 회사측은 “중국이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시장규모가 커지고 있다”며 “사업기회 선점과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승진 인원을 늘렸다”고 밝혔다. 삼성의 중국 지역 승진 인원은 2002년에 12명이었다가 지난해 11명으로 줄었지만 올해는 전년 대비 46%나 오른 16명이 해당임원이 됐다.INTERVIEW | 박광서 타워스페린 한국지사장“사람 중심에서 직무 중심으로 가는 과도기”“한 마디로 인사에도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죠.”인사조직 전문 컨설팅업체 타워스페린 한국지사의 박광서 사장(52)은 “임원 인사의 트렌드는 서구식도 한국식도 아닌 글로벌화”라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전세계적으로 성과와 역량 중심으로 인사구조가 집중되는 것이 글로벌 방식이라는 설명이다.“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기업의 임원 인사는 젊어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역시 같은 이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박사장은 90년대 후반 이후 우리나라 임원 인사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나이가 젊어지는 것을 꼽았다. 그 배경으로는 한국 사회의 노령화 현상과 서구적인 사고방식의 도입을 들었다.“사회는 노령화되는 반면에 신기술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젊은 인력을 선호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기업들이 의식적으로 임원진을 젊은 사람들로 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그는 “외국의 경우는 임원진이 젊어지고 있다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며 “지금껏 나이를 고려해 온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나이를 불문하는 서구방식을 받아들이다 보니 이제 역으로 젊은 사람이 선호되는 현상이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그는 또 한국의 임원 인사가 성과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 방식을 수용하는 과정에 있지만 학벌을 중시하는 경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지방대 출신들이 약진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학력과 무관한 영업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명문대학 출신 임원의 비중이 높은 것을 예로 들었다.이공계 임원들이 주목받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의외의 평가를 내렸다. 그는 “수적으로도 아주 미미한데다 대부분 이공계 학부를 졸업한 뒤 경영자 수업을 새로 받은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박사장은 “직무 중심의 서구사회와 달리 우리나라는 사람 중심으로 인사관리가 이뤄져 왔다”며 “따라서 그동안 임원 인사 역시 장기적인 계획에 의해서라기보다 상황논리에 의해 진행된 경향이 있다”고 한국 기업의 임원 인사를 평가했다.그는 “그동안 연공서열식 인사로 임원이 됐던 고령의 잉여 임원들이 지난 2~3년 사이에 점차 정리되는 분위기”라면서 “이제 우리나라도 성과와 역량 위주의 임원 인사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박사장은 또 “이제 초기 단계인 CEO 양성 프로그램도 자리를 잡게 되면 10~20년에 걸쳐 기업의 핵심인재가 길러지는 풍토가 형성될 것”이라고 덧붙였다.